'흑인 불륜남'이란 이유로 대학생 살해 누명을 썼다

입력
2022.10.28 04:30
수정
2022.10.28 07:27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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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미국 앨라배마주 세탁소 총기 살인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86년 11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먼로빌의 한 세탁소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된 당시 18세 여대생 론다 모리슨의 생전 모습. 히스토리vs헐리우드 홈페이지 캡처

1986년 11월 1일 미국 앨라배마주 먼로빌의 한 세탁소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된 당시 18세 여대생 론다 모리슨의 생전 모습. 히스토리vs헐리우드 홈페이지 캡처

1986년 11월 1일 아침 미국 앨라배마주 먼로빌의 세탁소에서 백인 여성의 시신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18세 대학생 론다 모리슨. 세탁소 점원이었다. 모리슨은 등에 세 발의 총을 맞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먼로빌은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마을 주민의 소행일 리 없다고 믿었다. 단란한 가정의 외동딸인 모리슨은 백인 지역사회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였다. 경찰도 외부인에 의한 강도살인이라 추정했다.

경찰은 먼로빌에서 구직활동을 하던 남미계 미국인 2명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살인 사건 당일 알리바이가 확인돼 용의선상에서 뺐다. 수사는 계속 벽에 부딪혔다. 몇 달이 지나자 주민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역 언론은 경찰의 무능을 비판했다. 지역 상인들은 경찰을 믿을 수 없다면서 직접 현상금을 걸었다.

가장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은 톰 테이트였다. 모리슨이 살해되고 며칠 만에 지역 보안관에 부임한 그는 수사에 길을 잃은 상태였다.

'백인 여성과 내연관계' 흑인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체포

론다 모리슨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저스트 머시'의 한 장면. 더페이스닷컴 캡처

론다 모리슨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저스트 머시'의 한 장면. 더페이스닷컴 캡처

1987년 6월 테이트는 용의자를 체포했다. 트럭을 몰고 퇴근 중이던 46세의 흑인 남성 월터 맥밀리언. 그는 백인 여성 캐런 켈리와 내연 관계였고, 마을에도 소문이 나 있었다. 경찰은 맥밀리언에게 “너희 깜둥이들이 다시는 백인 여자들과 어울려 다니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말하며 모욕했다.

맥밀리언은 목재 사업을 하는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먼로빌의 흑인 사회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다. 아내와 세 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전과 기록은 없었다.

맥밀리언을 체포한 경찰은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동성애 혐의를 씌웠다. 당시 앨라배마주에선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경찰엔 살인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없었다. 맥밀리언도 혐의를 일관되게 부인했다. 그러나 경찰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이때 켈리의 또 다른 남자친구인 랠프 마이어스가 등장했다. 백인 마약사범인 마이어스는 비키 린 피트먼이라는 젊은 여성 살인 사건에 휘말리자 맥밀리언을 피트먼 살인 용의자로 지목하며 빠져나가려 했다.

경찰은 피트먼 살인 사건엔 관심이 없었다. 맥밀리언에게 모리슨 살해 혐의만 추궁했다. 피트먼은 가난한 백인 가정 출신인 데다 가족 중 한 명이 교도소에 복역 중이어서 지역사회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모리슨 사건을 해결해야 명예를 되찾을 수 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었다.

마이어스는 맥밀리언이 모리슨을 살해했다는 구체적 진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진술 취지는 이랬다. "먼로빌 시외의 주유소에서 차에 기름을 넣고 있었는데 맥밀리언이 총으로 위협해 그의 트럭에 강제로 탔다. 팔을 다친 맥밀리언이 먼로빌 시내로 내가 차를 몰게 하더니 세탁소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점원을 죽였다'고 말했다. 맥밀리언은 내가 다시 주유소까지 차를 몰게 했고, '오늘 듣거나 목격한 것을 발설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진술이었다. 그러나 그 진술을 뒷받침하는 목격자까지 나왔다. 흑인 남성 빌 훅스는 모리슨이 살해된 시간에 세탁소 앞에서 남자 두 명이 탄 트럭이 출발하는 것을 봤다고 주장했다. 훅스는 각종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드나들며 수사기관에 별의별 제보를 해 '감방의 밀고자'로 불렸지만, 그의 진술은 의심받지 않았다.

맥밀리언의 공소장이 완성되자 지역사회는 안도했다. 단 두 명의 진술만 있고 물증은 여전히 없었지만, 마침내 살인범이 잡혔다는 사실이 주민들에겐 더 중요했다. 테이트 보안관을 비롯한 경찰, 검찰에 격려가 쏟아졌다.

흑인 1명뿐인 배심원단 유죄 평결... 사형 선고

월터 맥밀리언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변호인들이 공판 대응전략을 상의하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월터 맥밀리언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변호인들이 공판 대응전략을 상의하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맥밀리언에게도 알리바이가 있었다. 사건 당일 그는 일을 나가지 않고 집에 머물렀다. 알리바이를 입증할 증인도 10명 넘게 있었다. 친구 지미 헌터와 트럭 변속기를 분해해 청소하는 등 집에서 온종일 차를 수리했다. 그날 그의 집엔 친척들이 모여 있었다. 교회 헌금을 위해 판매할 생선 튀김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의 누나가 지역의 목사였다.

맥밀리언의 집과 세탁소의 거리는 약 17㎞. 맥릴리언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외출했다 살인을 하고 돌아오기는 어려운 거리였다.

성실하고 부지런한 맥밀리언은 흑인 지역사회에서 깊이 신뢰받는 인물이었다. 흑인 목회자와 주민, 친척 등이 "맥밀리언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아니니 석방해달라"고 테이트 보안관에게 탄원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찰의 만행은 계속됐다. 맥밀리언은 교도소로 이송됐다. 그를 용의자로 지목한 마이어스와 함께였다. 미결수를 교도소에 가두는 것은 불법이지만, 경찰은 "자백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맛을 보여주겠다”고 협박하며 두 사람을 사형수 독방에 각각 감금했다.

맥밀리언의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형 공포에 짓눌린 마이어스는 “맥밀리언이 모리슨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진술을 추가했다. 훅스도 “개조한 맥밀리언의 트럭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맥밀리언의 변호사는 사건 당일 맥밀리언의 집을 방문한 증인을 3명이나 불렀지만, 먹히지 않았다.

배심원단 구성도 맥밀리언에게 불리했다. 백인은 11명, 흑인은 1명뿐이었다. 배심원단의 유죄 평결을 받은 맥밀리언은 1988년 9월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공익 변호사 "허위 자백" 진술받아 반전

론다 모리슨 살인 혐의로 6년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재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월터 맥밀리언(왼쪽)과 그를 무보수로 변론한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론다 모리슨 살인 혐의로 6년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재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월터 맥밀리언(왼쪽)과 그를 무보수로 변론한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2개월 뒤 맥밀리언에게 귀인이 나타났다. 하버드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하고 비영리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28세의 흑인 변호사 브라이언 스티븐슨. 맥밀리언의 변론을 자처한 그는 공소 사실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스티븐슨은 마이어스를 설득해 "허위자백을 했다"는 증언을 받아냈다. 태도를 바꾼 마이어스는 "테이트 보안관 등이 '맥밀리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으면 사형을 선고받게 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진술했다. 마이어스가 경찰 조사 첫날 “솔직히 말해 (모리슨 살인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결백한 사람에게 살인죄 누명을 씌울 순 없다”고 말한 녹취가 법정에 증거로 제출됐다.

스티븐슨은 사건 현장에 최초로 출동했던 경찰관에게 “마이어스가 증언한 시신의 위치와 실제 위치는 달랐다”는 증언도 이끌어냈다. 맥밀리언의 트럭이 개조됐다는 훅스의 증언을 반박하는 증언도 받아냈다.

맥밀리언과 스티븐슨의 법정 투쟁은 쉽지 않았다. 1992년 5월 앨라배마주 볼드윈 카운티법원은 “마이어스가 1심에서 위증을 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으며, 위증했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맥밀리언의 항소를 기각했다.

스티븐슨은 장외 여론전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의 제보로 미국 CBS방송 시사 프로그램 ‘60분’에 맥밀리언의 억울한 사연이 가감없이 소개됐다. 여론은 점차 맥밀리언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모리슨 살인 사건 재수사가 시작됐다. 스티븐슨은 자신이 찾아낸 증거를 수사팀과 적극 공유했다. 얼마 뒤 수사관들은 “맥밀리언이 모리슨을 살해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재수사 결과를 스티븐슨에게 전해왔다. 마이어스와 훅스도 재수사 과정에서 허위자백 사실을 인정했다.

6년 만에 석방됐지만... 조기 치매 앓다 세상 떠나

론다 모리슨 살인 혐의로 6년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재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월터 맥밀리언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론다 모리슨 살인 혐의로 6년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 뒤 재심에서 무죄로 석방된 월터 맥밀리언이 1993년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퀄 저스티스 이니셔티브(EJI) 홈페이지 캡처

1993년 2월 맥밀리언은 활짝 웃었다. 앨라배마주 대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5대 0으로 파기하고 재심을 선고했다. 검찰은 재수사가 필요하다며 재심 심리 일정 연기를 요구했다. 스티븐슨은 맥밀리언 사건의 공소유지 책임자인 톰 채프먼 검사장을 찾아가 “당신의 일은 유죄 판결을 지키는 게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득했다.

한 달 뒤 열린 재심 공판에서 채프먼은 “증거를 다시 살핀 결과 검찰은 변호인의 청원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 대한 모든 혐의를 기각한다”고 선고해 맥밀리언을 석방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수 신분이 된 지 6년여 만이었다.

맥밀리언은 사회 정의에 눈떴다. 스티븐슨과 함께 미국 사형제도의 맹점을 지적하는 활동을 벌였다. 미 상원 법제사법위원회 청문회, 법률학회 등에 참석해 증언했다. 이후 목재 사업을 재개했지만, 나무를 베다 다친 이후 건강을 잃었다. 수감 생활에 따른 정신적 외상으로 추정되는 조기 치매를 앓다가 201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72세 때였다.

그렇다면 모리슨을 살해한 진범은 누구일까. 스티븐슨은 모리슨을 스토킹했던 백인 남성을 용의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앨라배마주 검찰은 수사에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모리슨 살인 혐의로 아무도 기소하지 않았고,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았다.


김청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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