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생명단축 동참하라는 법안

입력
2022.11.07 00:00
26면

편집자주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 그러나 연명의료기술의 발달은 죽음 앞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이 상충하는 새 법안
한국 노인 90%, 자식 부담 없는 죽음 원해
의료비 걱정 없어야 진정한 자기결정 가능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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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2년 미국 언론의 관심을 끌었던 연명의료중단과 관련된 사건이 있었다.

열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한 20대 한국 여성이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훈련을 받던 중 쓰러졌다. 검사 결과 뇌종양으로 진단되었으나, 수술하기에는 너무 진행된 상태여서 방사선과 항암제치료를 받았다.

그 후 9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급격히 악화하기 시작했다. 전신 마비가 발생하여 스스로 음식물을 삼킬 수 없어서, 코를 통해 위장으로 관을 삽입한 뒤 영양공급을 해야 했다. 그런 상태를 2개월 정도 유지하다가, 심한 경련과 함께 호흡곤란이 발생하여 인공호흡기까지 달게 되었다.

인공호흡기를 적용한 3주 후, 몸은 움직일 수 없으나 의식은 명료했던 환자는 자신의 변호사를 통해 연명의료중단 서류를 작성했다. 그리고 의료진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하였고, 병원도 환자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환자 부모가 강력히 반대하여, 병원은 법원에 최종 결정을 요청하였다. 1주일 후, 법원은 환자 본인의 결정을 존중한다는 판결을 했고 병원은 3일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계획이었다.

판결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이 인터넷매체 등을 통해 반대운동을 펼치자, 미국의 주요 언론도 이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자신으로 인해 부모가 논란의 중심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환자가 결국 인공호흡기 제거 의사를 철회하였다. 환자 부모는 집에 인공호흡기를 설치하고 환자를 집으로 옮겼고, 3개월 후 사망했다.

미국 언론은 이미 성인인 딸의 자기결정권에 부모의 개입이 정당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반면, 미주판 한국 신문들은 가족들이 환자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었다라는 내용의 인터뷰를 소개했다. 가족보다 개인이 더 중요한 미국적 사고방식에서 보면 이해가 어려운 한국인의 정서였다.

우리나라도 2018년부터 임종 과정에서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인정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시행하고 있으나,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두어도 가족이 동의하지 않으면 시행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기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의료진이 도와주는 조력자살을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서 합법화하자는 조력존엄사법안이 제출되었다. 자기결정권의 해석과 적용에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간과되고 있다.

첫째, 환자의 의사결정에 가족의 영향이 크다는 점이다. 2020년도 노인실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노인 중 90.6%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을 좋은 죽음으로 생각하고, 간병 등으로 주변에 부담을 주는 것을 꺼리고 있다. 이는 다른 나라의 조사에서는 잘 관찰되지 않는 소견이다. 간병하는 가족들 앞에서는 빨리 죽고 싶다고 말하다가도, 의료진만 있게 되면 더 살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환자도 적지 않다.

둘째, 자기결정권과 생명권의 충돌이다. 조력존엄사법안은 의사조력자살을 합법화하자는 것이다. 의사 입장에서는 환자의 생명을 단축하는 악행에 동참하는 것이고, 자살방조죄에 해당한다. 의료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것을 본업으로 한다. 이런 의료 본연의 목적과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상충한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자기결정권이 의료의 기본인 생명권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필요하다.

의학적 결정에서 환자의 자율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경제적 문제나 간병 부담 등에 환자의 결정이 영향을 받는다면 이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권은 아니다. 따라서, 호스피스·완화의료와 같은 의료 및 사회보장제도부터 확충하여야 할 것이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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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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