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의 침묵은 '구리'다

입력
2022.11.1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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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뉴스1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리고 있다. 뉴스1

위정자에게 정견을 밝히는 일은 선택 아닌 의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라고 알리고 동의하는 이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일이 바로 정치의 본령 아니던가. 언론이 정치인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쌀로 밥 짓는 수준의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이런 의무를 새카맣게 잊은 모양이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9월 말 여야의 당대표(국민의힘은 비상대책위원장)와 원내대표, 그리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의원까지 총 20명에게 질의서를 보냈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임금 착취 실태를 보도한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계기로 나온 중간착취 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묻기 위해서였다. 보도 후 국회에는 총 8건의 관련 법이 발의됐지만, 그 어떤 법안도 소관 상임위원회인 환노위조차 넘지 못했다. 첫 법안이 제출된 지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왜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질의서는 '네 혹은 아니오'라고 답하면 그만일 정도로 간단한 내용이었다. ①이 법안들의 입법을 목표로 논의할 계획이 있나 ②있다면 시기는 언제인가. 한 달이 지나도 답변을 보낸 의원실은 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었다. 의원실마다 연락을 돌려 중간착취 금지법에 대한 입장을 묻기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질의 대상 중 절반에 가까운 의원실에서 "담당자가 자리를 비웠다" "곧 연락하겠다" 등의 대답만을 되풀이했다. 10차례가 넘는 전화를 받고도 끝내 회신하지 않거나 전화와 문자, 카카오톡 메시지 등 여러 수단으로 연락했는데도 깡그리 무시한 의원실도 있었다.

중간착취 금지법이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의원실에서는 답변을 않았을까. 현행법에는 중간착취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인건비 100만 원 중 90만 원을 떼여도 불법이 아닌 데다가 간접고용 노동자들 대부분은 아예 자신이 얼마를 떼이는지도 모른다. 중간착취 금지법은 임금 전용 계좌를 도입해 원청이 책정한 직접 노무비를 용역·파견업체가 중간에 착복하지 못하게 하거나 근로계약 시 파견 수수료를 노동자에게 알려주자는 시도다. 정쟁의 대상이거나 사회적으로 예민한 내용이 아니기에 환노위원 중 절반 이상이 답을 않았다는 의미는 그저 무관심일 수밖에 없다.

법안의 제·개정은 가벼이 여길 일은 아니다. 법은 단 한 글자를 고치더라도 모든 국민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 국회에 발의된 중간착취 금지법에 심각한 부작용이나 결함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입법부에서의 심도 있는 숙의가 중요하지만 관련 법은 심사 대상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향후 법안이 상정될지 여부조차 알 수 없게 됐다.

'침묵은 금(Gold)'이라는 이제는 인용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유명한 격언이 있다. 그러나 의무를 진 이들의 침묵은 어떠한 쓸모도 없는 직무 유기이기에 금에 비할 가치가 없을뿐더러 은, 동도 아닌 구리(Cu)다. 사실 요긴하게 쓰이는 금속인 구리조차 아깝고 '구리다'라는 형용사는 제법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본보 취재팀의 거듭된 질의에도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구리'인 침묵을 지킨 의원들의 이름을 여기에 적는다. 정진석, 임이자, 김형동, 이주환, 정찬민, 지성호(이상 국민의힘 소속) 의원, 이은주 정의당 의원이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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