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을 맞으며

입력
2022.11.17 00:00
27면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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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는 날이다. 2004년, 혹은 그 이전에 태어난 약 50만 명의 우리 아이들은 초등 입학 이후, 아니면 그 이전부터 오늘의 시험을 준비하며 어려운 시간을 참아내고 지내왔다. 입시 지옥이라는 말은 언제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옛날에 만들어졌지만, 학생들의 준비과정은 그 말이 만들어지던 그때보다 더 어려워졌다면 어려워졌지, 쉬워졌다고는 볼 수 없다.

기성세대들은 부끄럽게도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아이들의 그런 어려움을 덜어주지 못했다. 사실 기성세대가 그 오랫동안 학교 교육에 바랐던 건,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사람을 고르고 가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입학시험의 변별력이라는 이름으로 학생들의 등급을 나누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해왔고 때로는 그 등급을 더 촘촘히 가르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입으로는 줄 세우기가 학생들을 괴롭게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줄 세우기를 강요하고 어쩌면 즐기기까지 해왔다. 아마 올해도 여지없이 입시가 끝나고 나면, 서울대에 많이 보낸 고등학교 순위를 매겨 지면을 채우는 신문사들이 있을 거다. 진정 그것이 기성세대가 교육에 바라는 모습인가? 이렇게 국민의 대다수가 학생과 학교에 등급을 부여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제대로 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의 요구가 학생들의 등급을 가려내는 거라고 한다면, 교육은 그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한 사회의 도약'이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교육의 도약을 위한 사회적 전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한 교육만 홀로 '튈'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실 교육은 그 사회의 정직한 거울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진단이다. 교육이 비춰주는 우리의 모습은 교육이라는 거울을 닦는다고 깨끗해질 수 없다. 더불어 살기에 실패하고 약한 사람들을 경멸하거나 딛고 올라가는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기성세대의 모습이 학생들의 과열 경쟁으로 나타나고 부모 세대의 소득불평등이 자녀들의 학력 격차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한다. 교육 정상화는 약자를 일으켜주고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고 등을 밀어주는 등 사회의 품위가 올라가는 사회의 정상화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교육은 그 사회의 모습과 기성세대의 생각을 정직하게 반영할 것이다.

물론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연마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학생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그들이 배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변화가 필요하겠지만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나갔으면 한다. 교육 시스템 내에서는 우선 상대평가의 과잉에서 벗어나 보자.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등급분포를 맞추는 시험 문제를 내느라 힘쓰시는 걸 보면 상당히 안타깝다. 대학에서도 '상위 35% 이내만 A학점을 주라'는 식으로 '공정한' 상대평가를 강요당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을 느낀다. 수학능력시험을 포함한 많은 시험이 사실 그 취지상 상대평가가 되어서는 안 되는 시험이다.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꼭 상위 1%나 4% 혹은 10%의 학생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험의 취지에 맞게 수학능력시험에 지나친 변별력을 요구하지는 말자. 물 수능, 불 수능을 오가는 난이도로 우리 아이들을 당황케 할 필요도 없다. 수학능력시험을 절대평가로 바꾸어야 한다. 계속 상대평가를 고집하려면 이름을 바꾸자. 대학 입학 배제를 위한 시험이라고.


김진영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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