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달콤했던 와인 이야기

입력
2022.11.30 22:00
수정
2022.12.01 10:33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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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었지만 월급이 없는 생활은 가혹한 것이었다. 전혀 낭비를 하지 않았는데도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0원'이 찍히는 사건이 몇 번 일어났다. 돈 5만 원이 없어서 친구 부친상에 가지 않았더니 다른 일로 전화했던 그 친구가 "넌 그동안 다른 경조사엔 빠지지 않고 가는 것 같더니 왜 우리 아버지 때만 오지 않았니?"라고 추궁을 하는 일도 있었다. 설마 그런 걸 따져 묻는 사람이 있겠냐 싶겠지만, 정말 그랬다.

다행히 아내의 배려로 제주도에 혼자 내려가서 한 달간 원고를 썼던 책의 반응이 좋았다. '부부가 둘 다 놀고 있다'는 내용의 첫 책은 출간 4개월 만에 6쇄를 찍었다. 아는 사람은 물론 모르는 독자까지 내 책을 사주었으니 이제 작가로서의 길이 열리나 보다 생각했지만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리가 없었다. 책 판매 인세나 북토크 강연료로는 은행 이자도 내기 힘들었다. 생활비가 막막해진 나는 구청에 가서 '희망근로'를 희망했다. 다행히 동네 고등학교에 일자리가 생겼다.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가서 그들의 손이 닿을 만한 곳을 소독하는 일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급하게 만들어진 '공공근로'였다. 나는 매일 고등학교 교실과 복도의 책상과 손잡이를 닦으며 다음 책에 쓸 글쓰기 아이디어들을 하나씩 떠올리고 메모했다. 단순 작업은 마음을 편하게 해 주고 집중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잘 아는 오디오 콘텐츠 업체 대표님이 전화를 했다. 이어령 선생과 김지수 기자의 베스트셀러 인터뷰 책을 오디오 콘텐츠로 제작하려 하는데 그 프로젝트의 기획서와 오디오 대본을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박수를 치며 당장 하겠다고, 고맙다고 외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보니 대본 작업을 의뢰받은 작가는 나 하나가 아니었다. 네 명의 작가를 선발해 경합을 시킨 뒤 그중 가장 잘 쓴 사람 하나를 뽑아 나머지 작업을 맡긴다는 것이었다. 씁쓸하지만 따를 수밖에 없는 '경합의 룰'이었다.

작업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동네 스터디 카페에 갔다. 어떻게 하면 이어령 선생의 통찰과 박학다식함을 청취자들에게 잘 전할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늦은 밤까지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새벽 한 시 반쯤 집으로 돌아오는데 싸락눈이 살짝 쌓인 골목길에 웬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얼른 지폐를 주워 외투 주머니에 넣고는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 나 길에서 만 원을 주웠어." 집에서 한숨만 내쉬고 있던 아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그런 돈은 얼른 써야 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편의점에 가면 9,900원짜리 와인이 있어. 그걸 한 병 사와."

동네 편의점에 가서 매대에 누워 있는 9,900원짜리 화이트 와인을 한 병 샀다. 집으로 가니 아내가 냉장고에서 꺼낸 치즈를 썰어 왔다. 아내와 나는 와인잔을 쨍그랑 부딪치며 웃었다. 지금 힘든 일은 금방 옛날이야기가 될 거라며 마셨고 열심히 살다 보면 오늘처럼 작은 행운이 또 올 거라고 말하며 또 마셨다. 며칠 후 이어령 선생 오디오 콘텐츠 작업 작가로 내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앞으로 나는 수십 수백만 원짜리 와인을 마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마신 9,900원짜리 와인보다 더 맛있는 와인은 다시없을 것 같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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