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메추' '떼르메스' '엄마카세'...외계어라고? 애환 담긴 생동의 언어!

입력
2022.12.01 17:00
수정
2022.12.01 19:51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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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전문가 정유라 '말의 트렌드'

알고 보면 모든 말에는 이유가 있다. 정유라 바이브컴퍼니 연구원이 '말의 트렌드'에서 한 말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알고 보면 모든 말에는 이유가 있다. 정유라 바이브컴퍼니 연구원이 '말의 트렌드'에서 한 말이다. 게티이미지 뱅크

“문화체육관광부를 문체부로 줄여 부르듯,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아아로 부른다고 없어 보이는 표현이 아니다. 줄임말에 ‘국어파괴’라는 누명을 씌우는 건, 줄임말 입장에서는 좀 억울한 일이다.”

너무 맞는 말이다. MZ세대(1980~2000년 초반 출생)가 말 좀 줄여 쓴다고 “요즘 애들 이상해”라고 정색하면 곤란하다. ‘점메추’(점심 메뉴 추천), ‘분좋카’(분위기 좋은 카페)를 모른다고 ‘소통이 어려운 세대’라고 단정하는 것도 섣부르다. 솔직히 그들은 신경도 안 쓸 테다. 기성세대가 외계어처럼 느끼는 MZ 언어는 애초 다른 세대와의 소통을 위해 만든 말이 아니다.

빅데이터 전문가 정유라 바이브컴퍼니 연구원이 쓴 ‘말의 트렌드’는 MZ세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렌즈를 제시한다. 말이 탄생한 배경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그의 시선을 좇으면 ‘MZ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고양감도 든다. 특히 빅데이터라는 바다에서 사회적 맥락을 건져 올리는 솜씨가 일품. “하루 12시간씩 인터넷을 들여다보니 정작 개인적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에는 거리를 두게 되더라”라는 고단함이 이해될 정도다.

“자주 사용하는 줄임말은 MZ의 일상을 보여준다.” 이 명제만 숙지해도 MZ세대에 한발 다가갔다고 할 만하다. 가령 ‘편도’와 ‘삼김’에는 학원 스케줄 때문에 매일 편의점 도시락과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때우는 청소년의 애환이 녹아 있다. ‘떼르메스’(에르메스급의 고급 때밀이)와 ‘에루샤’(에르메스ㆍ루이비통ㆍ샤넬)에는 요즘 애들의 선망이 담겼다. “세상에는 우리가 수호해야 할 문학성, 역사성, 품격을 가진 언어가 있지만, 거리에는 생동하는 사회의 표정이 있다.”

그가 보기에 MZ는 ‘애정이 많은 세대’다. 부모가 해준 집밥을 고급 일식당 부럽지 않은 ‘엄마카세’(엄마가 해준 맞춤요리 오마카세)라 부르고, 업무차 간 출장도 ‘호캉스’(호텔 바캉스)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맛난 빵집을 찾는 취미는 ‘빵지순례’라 하여 거룩하게 승화한다.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표현해 풍요롭게 만드는 게 ‘언어를 다루는’ 우리네 인간의 특권. MZ는 삭막한 디지털 세대가 아닌 누구보다 인간적인 세대라 불러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정유라 지음ㆍ인플루엔셜 발행ㆍ339쪽ㆍ1만6,800원

정유라 지음ㆍ인플루엔셜 발행ㆍ339쪽ㆍ1만6,800원

인스타그램, 유튜브, 트위터, 틱톡, 블로그에서 쓰이는 표현은 사회적 선택 과정을 거쳐 우리 일상으로 침투한다. 과거에는 엘리트층과 거대 미디어, 시청률 30%를 찍는 개그콘서트 등 소수 권력이 언어를 독점했다. 지금은 불특정 다수의 공감과 재치로 넘어갔다. 그 무질서를 뚫고 올라온 단어는 다수 대중의 정서와 감수성을 대변한다. “디지털 언어는 결국 우리 시대 새로운 언어”다.

물론 헬조선과 맘충 같은 혐오 표현, 차별적 단어가 디지털 세계를 꽉꽉 채우고 있는 것도 사실. 저자는 “그런 혐오 표현은 세상에서 ‘전체 삭제’되길 바란다”면서 “부정적 단어는 시간이 흐르면 사회적 자정을 거쳐 순화되더라”고 했다. 흙수저가 어느새 웃수저(타고나길 웃기는 사람), 근수저(근육이 잘 붙는 행운아)로 쓰이는 게 한 예. 헬조선, 흙수저, 맘충 등의 단어는 우리 사회 균열을 공론화하고 해결책을 고민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MZ세대에게는 갓생 루틴이 생활의 일부다. 어러운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다. 게티이미지뱅크

MZ세대에게는 갓생 루틴이 생활의 일부다. 어러운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들의 의지다. 게티이미지뱅크

고등학교 국어 과목 부교재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구개음화와 사이시옷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가 쓰는’ 말이 생긴 문화와 맥락을 실감나게 배우길 바란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인스타그램 친구가 ‘인친’이 된다고 세종대왕님이 화를 내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언어에 담긴 재미를 맛보고 인식의 지평을 넓히기를 바라 마지않을까.

말의 트렌드 분석가인 저자에게 내년 트렌드도 물었다. “최근 온라인에서 본 글 중에 더 퍼졌으면 하는 단어가 있었다”며 ‘가보자’(한번 해보자)라는 단어를 꺼냈다. “기성세대는 MZ세대가 어려운 처지라고 안타까워하지만, 지금 세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준비하는 것 같다.” 갓생(부지런한 삶) 끝에 완생을 이루기를, 가본 끝에 가봤다고 외치기를.

정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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