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이스? 도로 살얼음!

입력
2022.12.24 04:30
22면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21일 대전 도심 도로 위로 얇은 살얼음이 생겼다. 연합뉴스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21일 대전 도심 도로 위로 얇은 살얼음이 생겼다. 연합뉴스

잠시 멀어진 무언가가 돌아온다는 것은 적잖은 위로가 된다. 돌아온 스타, 돌아온 기회, 돌아온 동네 형 등 돌아온 것은 원래 내 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쓰는 말도 그러하다. 2020년 초, 언론에 부쩍 등장한 '블랙아이스'는 조금은 쌈박한 말로 들렸다. 블랙아이스는 겨울철 도로 위에 얼음이 얇게 얼어붙은 현상이란다. 한번 녹았던 눈이 다시 얼면서 매연과 먼지가 엉겨 붙어 검은색을 띠므로 '블랙아이스(Black Ice)'라 부른다는 설명도 그럴듯하다.

2020년 1월 22일, 한국기자협회는 '도로 결빙은 어쩌다 블랙아이스로 개명됐나'라며 자성하는 목소리를 낸다. 실제로 블랙아이스란 말이 2019년의 신조어가 아니니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언론 보도에서 블랙아이스란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2012년이다. 뉴스 데이터 분석 시스템으로 검색했을 때, 2012년부터 8년간 블랙아이스가 등장한 기사는 총 1,052건이다. 그런데 2019년 12월 한 달간, 8년 치의 절반에 가까운 417건이 쏟아지자, 2020년 1월부터는 보통 사람들의 블로그와 입말에도 자연스럽게 오르내리게 된다.

블랙아이스가 표제어로 쓰일 때면 '도로 위 저승사자, 겨울 도로의 사신(死神), 도로 위 암살자, 도로 위 공포' 등 검은색에서 연상되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한술 더 떠서, 익숙한 살얼음과 달리, 이 말은 경각심을 높여 사고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도 했다. 오히려 '일종의 공포마케팅'이라며, 블랙아이스를 단 기사마다 언중들의 따끔한 댓글이 덧붙곤 했다. 2022년 12월인 지금, 기사 제목에 '얇게 살짝 언 길' 즉 '살얼음'이 돌아오고 있다. 3년 만이다. 언론이 '도로 살얼음', '도로에 살얼음이 끼다'라는 말을 다시 찾아 쓴 데는 그간 정체성 없는 외국어를 불편해한 언중들의 공이 크다.

고등학교 때 배운 사설시조 한 편이 생각난다. '동난지이 사시오'라고 외치고 다니는 장사꾼에게 동네 사람들이 '뭘 사라고 외치느냐, 알아야 사지'라며 되묻는다. 장사꾼은 '겉은 뼈요, 속은 고기요, 두 눈은 하늘을 향하고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움직이며 작은 다리가 8개, 큰 다리가 2개 달려 있고 청장은 아사삭하다'라고 설명한다. 그 긴 말 끝에 동네 사람들은 '너무 거북하게 외치지 말고, 그저 게젓이라 해라'라고 일침을 놓는다. 사설시조 속 우리 조상들이 오늘날 '블랙아이스'의 등장을 혹시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미향 영남대 글로벌교육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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