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가 익사할까 걱정하며 잠드는 섬..."집에 바닷물이 들어와요"

입력
2023.01.25 04:30
수정
2023.01.26 13:0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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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소멸국을 가다 ① 키리바시 
마을 전체 집어삼키는 '킹 타이드'
밀물에는 해안가 주택 고립돼
"21세기 끝날 땐 국토 50% 수몰"
일상이 된 재난, 위험한 안일주의

이달 9일 오후 5시 30분쯤, 키리바시 타라와 섬 에이타 테비케니코라 커뮤니티에 만조가 다가오자 마을 안까지 바닷물이 들어차고 있다. 에이타(키리바시)=장수현 기자


2018년 1월 1일 키리바시 타라와 섬 에이타의 테비케니코라 커뮤니티가 만조 때 침수된 모습. 사단법인 국체청소년연합 제공


편집자주

기후전쟁의 최전선에 태평양 섬나라들이 있습니다. 해발 고도가 1~3m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은 지구 온난화로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변 침식과 해수 범람이 삶의 터전을 빼앗은 지 오래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14개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1%가 안 됩니다. 책임 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부정의이자 불공정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 당신의 책임은 없을까요? 한국일보는 키리바시와 피지를 찾아 기후재난의 실상을 확인하고 우리의 역할을 고민해 봤습니다.


#. 한밤중 에스테마 에시에타(51)는 차갑고 끈적한 물이 온몸을 서서히, 기분 나쁘게 적시는 느낌에 잠을 깼다. 꿈이 아니었다. 집 안은 물바다였다. 집 밖도 물바다였다. 마을 깊숙이 들이친 바닷물이 마을을 조각냈다. 해안가 집 10여 채가 저마다 파도에 포위된 채 각각의 섬이 돼 있었다. 강풍이 괴성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가축들도 비명을 질렀다. 이웃들은 세간살이를 포기하고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교회로 도망치고 있었다. 에스테마도 부인과 함께 내달렸다.

태평양 섬나라 키리바시(현지 발음 키리바스)의 산호섬 타라와의 테비케니코라 커뮤니티(행정구역 '동'에 해당)에 사는 에스테마가 들려준 얘기다. 이곳의 주민들은 매년 최소 한두 번씩 이런 난리를 겪는다. 밀물과 썰물의 파고 차가 연중 가장 높아지는 '킹 타이드'(King tide·공식 명칭 스프링 타이드) 때문에 마을이 물에 잠긴다. 킹 타이드는 지구, 달, 태양이 일직선에 놓일 때 태양과 달의 인력이 합쳐지며 발생한다. 파도가 성인 남성 키 2배 정도로 커지고, 강한 바람을 동반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나라'인 키리바시는 적도와 날짜 변경선이 만나는 태평양 중앙에 있다. 사방이 망망대해라 접근이 쉽지 않다. 한국엔 '풍부한 참치 어장을 가진 나라', '아름다운 관광지'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꼬박 24시간을 비행한 끝에 이달 9일(현지시간) 오후 테비케니코라에 들어섰을 땐 듣던 대로 '파라다이스'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다. 넓은 평상처럼 생긴 마을회관에선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은 흙바닥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술래잡기 중이었다. 열대나무인 판다누스 나무 이파리로 지붕을 올린 전통 주택들은 벽도, 문도 없이 뚫려 있었다. 벽 대신 세운 나무 살 사이로 낮잠을 자는 가족이 보였다.

에스테마가 들려준 현실은 보이는 풍경과 정반대였다. 킹 타이드는 방심하고 있을 때 일상을 급습했다. "너무 힘겨운 시간이에요. 바닷물이 집 안까지 들어오니까 집에 있는 모든 물건을 되도록 높은 곳에 올려 둬야 해요. 가족들을 수시로 피신시켜야 하고요. 해안가 사람들은 연례행사를 견디다 못해 거의 다 이사를 가버렸어요."

킹 타이드가 과거에도 흉포했던 건 아니다. 지구가 망가질수록 킹 타이드의 피해가 커졌다. 평생을 테비케니코라에서 산 메레레 에리아(45)는 "초등학교 시절엔 킹 타이드가 와도 별 피해가 없었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파도는 더 자주, 더 사납게 마을을 덮쳤다. 피해가 가장 컸던 2019년엔 집 지붕이 통째로 날아가 방파제에 부딪힌 뒤 산산조각 났다. 바닷물이 허리만큼 차올랐다. 파도가 잠잠해지고 땅이 마르기까지 2, 3주가 걸렸다.

해수면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테비케니코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마을이 됐다. 평시에도 밀물이 킹 타이드처럼 거세게 밀려들어 마을을 할퀴기 때문이다. 킹 타이드가 1년에 1, 2번 발생했을 때는 1, 2번만 피난을 가면 됐다. 이제는 몇 번 짐을 쌌다 풀어야 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메레레는 "바닷물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자면서도 긴장해야 한다. 그게 제일 힘들다"고 한숨을 쉬었다.

키리바시 지도와 키리바시의 해수면 상승 시나리오. 그래픽=강진구 기자


온난화 책임 0.0002%…피해는 가장 먼저

키리바시 타라와 섬의 해안선. 한국일보 자료사진

키리바시는 산호섬(환초) 32개를 비롯한 33개 섬으로 구성돼 있다. 환초는 산호초가 고리처럼 이어져 만들어진 섬이다. 가운데에 석호를 품고 있다. 타라와 섬을 포함한 환초는 대부분 지역이 해발고도는 3m를 넘지 않는다. 키리바시어에는 1800년대 중반까지 '산'을 뜻하는 단어가 없었다.

낮은 고도 때문에 키리바시는 지구 온난화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난해 제6차 보고서에서 2050년 인류가 탄소중립을 달성한다 해도 2081~2100년에 지구 평균 기온은 섭씨 1~1.8도, 해수면은 55cm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지금의 온실가스 배출 추이가 지속돼 탄소중립 달성에 실패하면 해수면은 84cm나 치솟는다.

지난해 교토대 연구에 따르면 위와 같은 상황에선 2100년 타라와 섬 절반이 수몰된다. 현재 타라와 섬에 거주하는 인구 7만 명 중 60% 이상이 생존할 수 없게 된다. 키리바시가 배출한 이산화탄소가 전 세계 배출량의 0.0002%(2020년 기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가혹하고 억울한 미래다.

이제는 일상이 된 기후재난

지난 9일 오후 키리바시 타라와 섬 에이타 테비케니코라 커뮤니티에서 에스테마 에시에타가 자신의 집을 소개하고 있다. 에이타(키리바시)=장수현 기자

만조가 가까운 오후 5시 30분. 실내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자 마을이 바다에 다시 잠기고 있었다. 두어 시간 만에 밀물이 들어찬 결과였다. 집 주변에 쌓은 타이어 방파제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바닷물에 에워싸인 해안가 주택들은 고립돼 있었다. 에스테마는 "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썰물 때나 나올 수 있다"며 허탈하게 웃어보였다.

에스테마처럼, 마을이 잠기는데도 모두가 태연했다. 기후재난이 이들에겐 지긋지긋한 일상이었다. "미래가 걱정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에스테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은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달 10일 방문한 키리바시 타라와 섬의 템와이쿠 해변. 만조가 다가오자 파도가 돌 방파제 끝까지 올라와 물이 밖으로 튀고 있다. 템와이쿠(키리바시)=장수현 기자


국가의 운명은 신만 안다? 무력한 정부

"우리는 가라앉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은 신만이 안다." 2016년 취임한 타네티 마마우 키리바시 대통령이 공공연하게 하는 말이다. 키리바시는 기독교 국가이니 '신의 사랑'을 받아 무사할 것이라며 국민을 호도한다. "키리바시는 가라앉는다"는 구호를 만들어 세계의 도움을 호소했던 아노테 통 전 대통령과는 다른 행보다.

2003~2016년 재임한 통 전 대통령은 국토가 수몰된 미래에 키리바시인들이 낯선 외국에 가서도 대우받고 살 수 있도록 각종 기술을 가르치는 '존엄한 이주'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마마우 대통령이 기후변화 대응에 아예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그는 기후변화 적응 전략 및 재난 위험 감축 계획 104개를 담은 키리바시공동실행계획(KJIP), 키리바시 정부 차원의 기후변화정책(CCP)을 발표했다. '키리바시 20년 미래계획 2016-2036'에서는 타라와 섬 템와이쿠의 저지대를 간척해 고도를 2~5m 높이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문제는 마마우 대통령의 장밋빛 공약을 맹신해 안일주의에 빠져버린 키리바시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God only knows(신만 안다)!" '점점 심해지는 기후재난에 어떻게 대비하고 있냐'는 질문에 키리바시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근거 없는 낙관주의는 위험하다. 전 키리바시 중앙정부 공무원 A씨는 "'나라가 가라앉는다'는 이야기를 반복하던 통 전 대통령에게 지쳤지만, '괜찮다'는 말로 진실을 가리는 마마우 대통령이 옳은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키리바시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라의 운명을 바꿀 '힘'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지난 9일 키리바시 타라와 섬 베티오의 레이버라인 커뮤니티 해변. 거센 파도와 높아진 해수면 탓에 모래는 줄고 쓰레기와 자갈만 늘었다. 베티오(키리바시)=장수현 기자


에이타(키리바시)= 장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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