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해서가 아니라 나약해서 악마가 된다… 비밀경찰이 드러낸 인간의 본성

입력
2023.03.10 04:30
12면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 리뷰

편집자주

공연 칼럼니스트인 박병성이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뮤지컬 등 공연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격주로 연재합니다.

※ 이 글에는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의 금실 좋은 부부는 비밀경찰의 등장 이후 궁지에 몰린다. 랑 제공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의 금실 좋은 부부는 비밀경찰의 등장 이후 궁지에 몰린다. 랑 제공

"인간이 되긴 힘들어도 괴물은 되지 말자." 영화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다. 인간 말종에게나 할 것 같은 이 말을 영화에서 정작 듣게 되는 사람은 소심하고 평범해 보이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에서 이 대사를 떠올리게 되는 장면이 있다.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부부의 집에 갑자기 들어온 비밀경찰 엔카베데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사는데 왜 우리에게 찾아왔냐는 질문에 섬뜩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내가 여기에만 있는 거 같아?"

'미드나잇: 앤틀러스'는 아제르바이잔 작가 엘친 아판디예프의 희곡 ‘지옥의 시민들’을 뮤지컬로 각색한 작품이다. 시대적 배경은 공포 정치를 시행했던 스탈린 치하를 연상시킨다.

매일 수없이 많은 죄 없는 이들이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어디론가 끌려가 고문과 죽음을 당하는 공포의 세상. 한 부부의 옆집에 비밀경찰이 들이닥쳐 불쌍한 옆집 남편을 잡아간다. 아파트 전체에 울리는 구타와 비명 소리가 공포심을 자아낸다. 귀가한 남편은 아내를 안심시킨다. 남편이 내년이면 당에 충성한 공로로 면책권을 얻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자 가정은 금세 안정을 되찾는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을 축하하기 위한 샴페인과 음악, 그리고 춤.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고 행복이 넘쳐나는 가정의 풍경이 펼쳐지는데 갑자기 비밀경찰 엔카베데의 노크 소리가 울린다. 엔카베데는 위압적인 노크와는 다르게 잠깐 방 안으로 들어가도 좋은지 허락을 구한다. 마치 자신은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초대한 것인 양.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의 비밀경찰 역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젠더 프리로 남녀 배우가 함께 캐스팅됐다. 랑 제공

뮤지컬 ‘미드나잇: 앤틀러스’의 비밀경찰 역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젠더 프리로 남녀 배우가 함께 캐스팅됐다. 랑 제공

고문과 폭력이 자행되는 공포의 시대, 비밀경찰의 방문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을 아끼는 이 부부의 운명은 엔카베데의 손에 달린 것이다. 반역자의 단서를 잡으려는 엔카베데를 남편은 면책특권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부부는 엔카베데의 폭력을 피해 갈 수 있을까? 극은 관객들의 궁금증을 비웃듯 행복한 부부와 비밀경찰의 갈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부부의 행복을 깨는 것은 그들 자신이다. 부부를 궁지로 모는 것은 엔카베데가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안녕을 위해 맞바꾼 숨기고 싶었던 추악한 실체인 것이다.

엔카베데는 금실이 좋은 부부를 질투라도 하듯 남편이 어떻게 면책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아내에게 알려준다. 남편과 친한 동료 변호사가 잡혀가고 회사에서 진급을 도왔던 상사가 사라지고 옆집 남자가 갑자기 끌려가게 된 데에는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거래했던 남편의 거짓 고백이 있었다. 폭압의 시대에 평안의 가정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데에는 타인의 희생이 필요했던 것이다.

엔카베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추악한 얼굴을 들춰내며 평안했던 가정에 파문을 일으킨다. 남편의 본모습에 충격을 받은 듯한 태도를 취하던 아내 역시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얌전하고 조신해 보이던 아내는 치부가 드러나자 감추었던 본색을 드러내며 얌전히 당하고만 있지 않으면서 극은 더욱 흥미진진해진다. 남편은 엔카베데가 악마일 것이라고 의심한다. 부부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고 미스터리한 능력을 지닌 그가 악마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작품은 본색을 드러낸 부부에게 과연 누가 악마인지를 묻는다.

작품은 독재 정권의 폭력이나 감금, 감시를 폭로하는 사회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듯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인간의 본성을 건드린다. 인간이 잔인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괴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악마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드나잇: 앤틀러스’는 2017년 초연한 작품이다. 2019년부터는 비밀경찰인 비지터 역에 남자 배우와 여자 배우를 동시 캐스팅하는 젠더 프리를 시행해 왔다. 올해 공연에도 젠더 프리로 캐스팅해 비지터 역에 고상호, 박민성, 김려원이 출연한다. 같은 내용을 배우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참여하는 액터뮤지션 버전이 별도로 있다. 이번 버전은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극을 진행하는 앤틀러스 버전이다. 4월 23일까지 플러스씨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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