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절근무표’의 거짓 혹은 진실

입력
2023.03.12 17: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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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기절근무표. 온라인 캡처

기절근무표. 온라인 캡처


‘주 69시간 기절근무표’가 온라인에서 화제다. 정부가 현행 주 52시간제를 개편해 주 69시간까지 유연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하는 ‘근로시간 제도 개편 방안’을 내놓자 한 누리꾼이 1주일의 일과를 예상해본 시간표다. 주중엔 출퇴근, 식사시간을 빼면 매일 14시간씩 근무하고 잠은 5시간밖에 못 잔다. 그러니 주말엔 ‘기절’이다. 마치 기절한 사람처럼 뻗어 지낼 거라는 얘기다. 그나마 집안일 등으로 제대로 기절도 못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이건 가짜뉴스에 가깝다. 정부안에 대한 이해 부족이거나 의도적 왜곡이다. 주 69시간 근무 시에는 11시간 연속 휴식이 보장된다. 근로기준법상 4시간마다 30분씩 보장되는 휴게시간(총 1.5시간)을 뺀 하루 최대 근로시간은 11.5시간이다. 주당 1회 유급휴일을 주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주 6일 근무할 때 1주 최대 노동시간이 69시간(11.5시간x6일)이다.

□팩트에 기반해 기절근무표를 다시 만든다면,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10시에 퇴근하고, 일요일 하루는 온종일 기절하는 형태가 될 수 있겠다. 하지만 월 단위로 연장근로를 운영하는 경우 특정 주에 69시간을 근무하면 연장근로시간의 총량은 동일하기 때문에 다른 주 근로시간은 줄어든다. 둘째 주는 63시간, 셋째·넷째 주는 법정근로시간인 40시간만 근무하는 식이다. 특정 주만 부각시킨 ‘기절근무표’는 아무리 정확히 그려도 제도 본질을 왜곡한다는 게 정부 얘기다.

□하지만 한 달에 한 주 기절한다고 괜찮다고만 할 게 아니다. 현행 산업재해 관련 고시는 ‘주 최대 64시간 근로’를 과로 인정 기준으로 삼는다. 게다가 분기, 반기 단위로 운영하는 경우 한 달에도 몇 주씩 기절하는 주가 나올 수 있다. 특히 ‘주 최대 64시간’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를 택하면 11시간 연속 휴식도 보장하지 않는다. 연장근로를 저축해 기존 연차휴가에 더해 안식월 등 장기휴가가 가능하다는데, 지금도 연차휴가가 없어서 못 쓰는 게 아니라는 건 정부만 모른다. 정부는 팩트체크만 할 것이 아니라 기절근무표에 담긴 민심을 잘 읽길 바란다.

이영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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