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스민 선한 본성… ‘더 글로리’의 복수 조력자 염혜란

입력
2023.03.31 04:3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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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염혜란의 영화와 드라마 속 다양한 모습.

배우 염혜란의 영화와 드라마 속 다양한 모습.

영화 ‘증인’(2019)은 법정 드라마다. 자폐아 증인 지우(김향기)와 변호사 순호(정우성)의 우정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정우성과 김향기는 호연에 대한 대가로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을 각각 받았다. 두 배우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쏠린 ‘증인’에서 다른 배우에게 더 눈길이 갔다. 염혜란이었다.

염혜란은 ‘증인’에서 중년여인 미란을 연기했다. 미란은 가정부로 일하던 곳에서 집주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우가 유일한 목격자다. 영화는 지우의 증언이 법적 효력이 있는지를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절정을 만들어낸다.

미란은 순박한 말투와 표정으로 살인을 완강히 부인한다.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집주인을 말리려 몸싸움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미란과 집주인이 엉켜든 모습을 멀리서 보여준다. 미란이 집주인을 구하려 애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집주인을 죽이려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미란의 표정을 보면 그가 누명을 쓴 것처럼 믿게 된다. 영화가 끝을 향하면서 관객은 미란의 계획범죄를 알게 된다. 선한 얼굴 뒤에 웅크리고 있는 악을 발견하고선 소스라치게 된다. 미란이 1심에서 무죄를 받은 후 검찰이 항소했다는 소식에 뱉은 말은 스크린을 서늘하게 한다. “오매, 징하게 추접스럽네이…” ‘증인’에서 의문과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이는 오롯이 미란이다.

염혜란은 영화 '증인'에서 순박한 듯한 외모를 지닌 가정부 미란을 연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염혜란은 영화 '증인'에서 순박한 듯한 외모를 지닌 가정부 미란을 연기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염혜란은 의외로 선과 악을 오가며 다양한 연기를 선보여 왔다. 대중에게 얼굴을 널리 알린 드라마 ‘쓸쓸하고 찬란한 신-도깨비’(2016~2017)에서 그는 표독한 인물 연숙을 맡았다. 언니의 보험금을 노리며 조카 지은탁(김고은)을 구박하는 역할이었다.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2019)에서는 안하무인 변호사 홍자영을 연기했다. 맞춤옷처럼 얄밉게 역할을 해냈으나 염혜란 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들은 아니다. 그는 잔정 있고, 투박하나 누군가를 배려하는 인물이라는 인상이 강해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2017)의 진주댁이 대표적이다. 진주댁은 주인공 옥분(나문희)의 이웃이다. 옥분은 위안부라는 아픈 과거를 감추고 살고 있다.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기 위해 옛일을 털어놓게 되는데, 이웃들은 이를 알고 깜짝 놀란다. 진주댁은 가장 사근사근하게 옥분을 대했던 인물이라 흉금을 터놓지 않은 것에 서운함이 크다. 토라진 진주댁은 자신을 찾아온 옥분에게 “서운해서 그랬어요, 서운해서”라며 울음을 터트린다. 짧은 부산 사투리(염혜란은 전남 여수시가 고향이다)에 물기가 가득 담겨 진주댁의 마음을 전한다.

‘경이로운 소문’(2020~2021)에서는 모성이 느껴진다. 염혜란은 악귀에 맞서는 존재 ‘카운터’의 일원인 매옥으로 분했다. 동료들을 하나하나 챙기면서도 특히 주인공 소문(조병규)을 남달리 대한다. 어려서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외톨이 고교생 소문에게 매옥은 엄마 같은 존재다. 소문이 악귀와 다투다가 다쳤을 때 누구보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던 매옥에게 무구함이 느껴진다.

염혜란은 '더 글로리'에서 현남을 연기하며 냉가 가득한 화면에 온기를 섞는다. 넷플릭스 제공

염혜란은 '더 글로리'에서 현남을 연기하며 냉가 가득한 화면에 온기를 섞는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염혜란 연기의 정점이다. 그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현남을 연기했다. 남편을 죽여주는 조건으로 주인공 동은(송혜교)의 복수를 돕게 된다. 멍이 든 얼굴로 동은과 거래를 시도하는 모습, 동은을 위해 여러 사람들의 뒤를 밟는 장면 등은 차가운 정서와 더불어 스릴을 선사한다. 그가 “명랑한” 성격이라고 말할 때, 동은에게 뭔가를 들킨 후 딴청 부릴 때, 누군가를 미행하며 유심히 바라보다 상대방이 알아챌까 잠든 척할 때 등은 웃음을 부른다. 냉기 가득한 드라마에서 현남은 자주 온기를 빚어낸다.

현남이 딸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악인 연진(임지연)에게 굴복할 듯한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믿음을 놓지 않는다. 그가 끝내 동은의 편에서 충실한 복수의 조력자로 남을 것임을. 미국 영화학자 로버트 맥기는 명저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에서 등장인물의 본성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극단의 상황에 몰아넣는 것이라고 했다. 맥기의 주장대로라면 현남은 벼랑 끝에 선 상황에서 선함이라는 자신의 본성을 발휘한 셈이다. 염혜란의 얼굴에 스며 있는 선량함이 있기에 시청자들은 현남의 선택에 수긍하게 된다. ‘더 글로리’가 대중의 환호라는 영예를 얻었다면 많은 부분은 염혜란의 몫이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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