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황당한 설문조사라니

입력
2023.04.2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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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올해 1월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고은 시인의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왼쪽)와 시집 '무의 노래' 표지.

올해 1월 실천문학사에서 출간한 고은 시인의 대담집 '고은과의 대화'(왼쪽)와 시집 '무의 노래' 표지.

지난 주말 메일 한 통을 받았다. 한 출판사가 진행하는 설문조사였는데, 취지 설명문도 질문 내용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질문 몇 개를 옮기자면 이렇다.

"언론들이 고은 시인의 '5년 만의 신간 시집 출간'을 두고 '고은, 사과 없이 5년 만에 문단 복귀'란 제목을 붙여 마치 실권자가 복권된 것처럼 자극적인 프레임을 씌워 기사화했습니다. (중략) 이런 '제목 뽑기'를 선생님은 주관적 프레임 씌우기로 보시는지요? 객관적인 기사 제목으로 보시는지요?"

"언론과 여론이 순수 문학도서를 적법하게 출판한 출판사의 출판의 자유권리(헌법 21조)를 억압하는 것이 선생님은 정당하다고 보시는지요?"

누가 봐도 '답정너'인 질문들을 던진 곳은 실천문학사다. 지난 1월 고은 시인의 새 시집 '무의 노래' 출간으로 도마에 올랐던 출판사다. 2018년 성추문이 제기된 후 활동을 중단했던 고 시인이 '전 지구적인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돌아오자 비판 여론이 들끓었다. 요지는 성추행 의혹을 부인하며 벌인 법정 싸움에서 패한 후에도 여전히 책임 있는 사과나 해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최영미 시인 등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1, 2심 모두 패소하고 상고를 포기해 최 시인의 승소가 2019년 12월 확정됐다.) 해당 시집은 결국 출간 나흘 만에 판매가 잠정 중단됐다.

형식은 설문조사지만 사실상 억울함을 호소하는 성명서였다. 윤한룡 실천문학사 대표가 무기로 들고 나온 건 헌법이 보장하는 '출판의 자유'다. '마이너 인터넷' 신문의 고의적인 여론조사 결과 보도가 출판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식의 논리다. 판매 중단 결정을 내린 3개월 전에도 윤 대표는 한국일보에 보낸 메일에서 "여론의 압력과 출판의 자유 사이에서 출판의 자유가 우선하다고 결정 나면 (시집을) 판매할 것"이라며 사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았다.

이토록 황당한 설문조사라니. 굳이 정색하고 반박하자면 비판 여론을 부당한 권력으로 치부한 것부터 억지다. 더군다나 고발자의 시집 출간을 부담스러워하는 출판사들 사이에서 최 시인이 결국 직접 출판사를 차려 새 시집을 내야 했던 게 우리 현실이다. 출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맞서야 할 진짜 '권력'은, 조금만 고민해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가해자 권력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게 해줬다. 2018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확산된 이후 우리는 이런 일을 수없이 목격했다. 가장 최근에는 이달 초 박원순 전 서울시장 묘소가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모란공원으로 이장되는 과정이 그랬다. 모두 숨은 협력자들의 공(?)이 크다. 권력은 공생하던 조력자가 침묵하고 무감각한 공동체가 방관함으로써 유지된다. 가해자 홀로 지탱할 수 없다. 시인의 활동 재개도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법 절차와는 별개로 지난 5년간 문단과 학계, 출판계 대부분은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논란을 매듭짓기 위해 적극 나선 이들이 도리어 소외되는 현실은 시인과 출판사에 용기를 줬다.

결국 미투 운동은 이 공고한 협력 구조를 깨트리는 걸음이다. 이 역시 피해자 홀로는 할 수 없다. 그러니 기이한 설문에 분노했다면 이 해시태그를 한 번씩 떠올려 주길. '위드유(#WithYou·함께하겠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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