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개척자들을 만나러 갑니다...

커리업

“깨깨깨깨깨” 그래야 열려 - 남세동 맨땅브레이커 상편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 vol.1

깨져야 열린다, 새로운 세계가

천재라 불리던 한 청년의 삶을 좆아 커리어 여정을 떠나봅니다

2023.05.10

남세동대표
보이저엑스 대표 남세동

“저에게 개발은 곧 ‘문제풀이’예요.
사용자들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불편함을
보면 참지를 못해요.
항상 ‘저걸 어떻게 해결하지?’로 연결되죠.

커리어의 밑바닥에서 깨달았죠.
이미 ‘최악’을 경험했으니,
더는 부끄러울 게 없다.
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세상 밖으로
꺼내준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커리어 포인트
  • 사람
  • 사용자
  • 팀워크
  • 성장
  • 인공지능
오직 커리업에서, 오늘의 뷰 포인트
  • 백투더 Y2K
  • 남세동의 귀인

이토록 달콤쌉싸름한 업(業)생

‘천재 개발자’라 불린 이가 있습니다.

18세,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이 쓰게 될 채팅 프로그램(세이클럽)을 한 달 만에 만들었습니다. 27세엔 구글의 대항마로 만든 검색 엔진(첫눈)을 350억 원에 매각했습니다. 34세, 전 세계 5억 명이 쓰는 셀카앱(B612)을 내놔 모바일 세상으로 갈아타더니, 이듬해 돌연 10년 다닌 회사(네이버)를 때려치웠습니다.

방구석 은둔자로 코딩만 하며 살아보니, 세상에 컴퓨터와 나 이렇게 딱 둘만 남아도 살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 길로, 모바일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인공지능(AI)’과 ‘딥러닝’에 투신합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엔 창업과 동시에 100억 원짜리 투자 사기를 당합니다. ‘아뿔싸, 인생이란 거 참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머리 깎고 산에나 들어가려 했다죠. 인공지능 스타트업 ‘보이저엑스’ 대표 남세동씨의 이야기입니다. 영화로 만들기라도 하면 ‘설정 과다’라 손가락질받을 법한, 기막히게 파란만장한 커리어입니다.

그의 달콤 쌉싸름한 업(業)생사를 그래프 위에 그려달라 했더니, 고점은 하늘을 뚫고 저점은 바닥을 뚫는 엄청난 낙차의 파도가 넘실거렸습니다. 매일 1억 원을 현금으로 쓸어 모으던 시절을 거쳐, 하루아침에 100억 원의 투자금을 날린 날 사이에 놓인 시간은 15년. 천재개발자로만 세간에 알려진 그의 커리어 인생에 어떤 곡절과 기복이, 또 어떤 도전과 모험이 놓여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 ‘맨땅 브레이커’의 1호 인터뷰이는 보이저엑스의 남세동(44) 대표입니다.

2017년 출발한 보이저엑스는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모바일 스캐너 앱 ‘브이플랫’(vFlat), 자동으로 영상 자막을 달아주는 서비스 ‘브루’(vrew), 저렴한 가격에 손글씨를 폰트로 만들어주는 ‘온글잎’을 서비스하고 있다. 브이플랫의 월간활성이용자수(MAU)는 200만 명 이상이며, 온글잎의 폰트 제작 건수는 3만 건에 달한다.

커리어 그래프
chapter1

Chapter1. 열아홉에 친 ‘메가히트급’ 홈런

#1986, 잊을 수 없는 처음

누구에게든 잊을 수 없는 처음의 순간이 있다. 남세동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처음’이 발생한 때는 1986년, 주인집 거실 한편에 놓여 있는 ‘그것’을 봤을 때였다. 평생을 사랑하고 증오하며 지독하게 엮일 운명의 상대, 컴퓨터를 만난 순간.

열을 내뿜는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일곱 살 꼬마의 손은 키보드를 팡팡 눌러댔다. 누를 때마다 숫자가 올라갔다. Enter(엔터)키 위에 지우개를 올려놓고 넋을 잃었다. 까만 모니터 위에 초록색 숫자들이 변화무쌍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올라가는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게 남세동이 컴퓨터란 광막한 세계의 문을 연, 첫 순간이었다.

삼성에서 출시한 1990년대 컴퓨터 ‘알라딘 286’의 지면 광고.

삼성에서 출시한 1990년대 컴퓨터 ‘알라딘 286’의 모습.

1988년, 다시 만난 세계

“야, 텔레비전 같은 게 여러 대 생겼는데, 거기에 우리 이름이 나와.”

도대체 ‘텔레비전 같은 게’ 뭔지, 거기에 ‘내 이름’이 나온다는 건 무슨 말인지. 흥분해서 목소리가 잔뜩 커진 친구들을 따라가본 끝에 만난 건, 다시 컴퓨터. 짧았던 첫 만남으로부터 2년이 흐른 1988년이었다.

그해 당시 세동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국내 최초 ‘컴퓨터 시범 학교’로 지정됐다. 종일 컴퓨터만 하는 컴퓨터반에 들어갔다. 처음엔 까만 화면에 동그라미와 네모를 그려 넣는 것으로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엔 주사위를 굴려 말을 이동하는 윷놀이 게임을 자기 손으로 만들었다.

‘세동이는 컴퓨터만 끼고 산다’는 소문이 돌더니, 큰 맘 먹은 외삼촌이 집에 컴퓨터를 놔 줬다. 밥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오직 컴퓨터뿐이었다.

컴퓨터의 세계 가장 깊은 곳에 가라앉아 보냈던 10대의 끝자락에서, 그는 ‘웹web’이라는 커다란 파도에 올라타게 된다. 그 파도가 남은 인생의 전부를 지배할 정도로 거대하고, 또 지나치게 조속했던 성공을 그에게 안겨 줄 것이란 걸, 그땐 몰랐다.

컴퓨터, 컴퓨터, 오직 컴퓨터. 머릿속에 컴퓨터밖에 없었던 열여섯 살 남세동의 장래희망은 새삼스럽게도 물리학자였다고 합니다. ‘개발자’라는 단어가 널리 쓰이기 전이었을 뿐 아니라, 업의 개념조차 희미했던 시절이었죠. 물리학자를 꿈꿨던 이유는 순진했습니다.

“나는 과학 성적이 제일 좋으니까 = 나는 과학을 잘하니까.”

그 빼어난 성적을 앞세워17살에 과학고를 조기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이하 ‘카이스트’)에 입학하는 순간, 그 꿈은 금세 휘발돼버리고 말았죠.

‘내가 제일 천재인 줄 알았는데, 여긴 나 빼고 다 천재잖아!’

날고 기는 애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어요. 그렇게 공부는 사뿐히 놔 버렸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였죠. 첫째, ‘나 생각보다 못하네?’ 둘째, ‘못하니까 하기 싫어!’ 강의실에선 금세 주눅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미친 듯이 공부만 하는 학교에서 그래서 뭘 했냐고요?

“그냥 하루 종일 놀아버렸어요. 어떻게 놀았냐? 뭐가 따로 있겠어요. 컴퓨터죠. 술 퍼 마시면서 논 게 아니라, 종일 코딩하고, 게임하다 게임 만들고, 그러다가 전자게시판(BBS) 같은 것도 만들어보고. 그거의 연속, 또 연속이었죠. 그도 그럴 게 카이스트는 정말 그걸 하기 좋은 환경이었거든요.”

세동씨가 대학에 입학한 1996년, 카이스트엔 국내 최초로 강의실 건물, 기숙사 전체에 고속통신과 근거리통신망(LAN)이 일제히 깔렸습니다. 전국 최초였던 건 물론, 전 세계 인터넷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파격적 설비였죠.

당시 카이스트 전산학과 교수이자, 한국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렸던 전길남* 박사의 영향이었습니다. 세동씨 같은 ‘컴퓨터 긱(computer geek)’들에겐 말 그대로 밥만 먹고 밤새 인터넷만 할 수 있는 천국이 열린 셈이었습니다.

“자원이 풍부한 환경에 있다 보면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자기만’ 보는 것들이 생겨요. 이때 카이스트를 다녔던 사람들이 2000년대 대한민국 인터넷과 게임 역사를 많이 이끌었거든요.

이를테면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 넥슨 창업자 김정주, 네오위즈 창업자 나성준 같은 사람들이요. 빌 게이츠가 처음 컴퓨터를 만진 게 1966년이에요. 그러니까 딱 열한 살일 때. 저보다 20년 넘게 앞선 거예요. 그 어린 나이에 컴퓨터 귀신이 된 그가 고등학생 때 폴 앨런을 만나 같이 창업한 게 마이크로소프트고요.

아아, 고기 맛을 본 사람이 고기를 먹을 줄도 알고, 나중엔 팔 줄도 아는 거구나.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요. 앞선 걸 먼저 보면, 거기서 앞선 생각을 할 수 있고, 앞선 일을 할 수 있다는 걸요.”

자원이 풍부한 곳에 나를 가져다 놓는 경험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많이 누리고, 맛보고, 즐기고, 무아지경으로 푹 빠져보기까지 했다면, 그 분야에서만큼은 시야의 질이 달라지거든요.

해상도 144p로 보는 세상과 2,160p 4K로 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릅니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선명한 시야를 갖게 되는 겁니다. 선명히 보는 사람일수록,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게 되죠. 더 광활한 그들만의 세계에서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놀 수 있게 되는 거고요.

1998년, 열아홉에 어쩌다 취업, 어쩌다 메가히트

“세동아. 당장 코딩할 사람이 필요한데, 너 좀 하는 거 같다. 일단 와서 일부터 해봐라.”

카이스트 컴퓨터 동아리 ‘스팍스’의 동방엔, 언제나 그 선배가 있었다.장병규. 베틀그라운드 신화를 쓴 ‘크래프톤’의 창업자이자, 아직까지도 현역에 있는 1세대 벤처기업인인 바로 그 장병규.

어찌어찌 전산학과에 들어가긴 했지만, 과연 컴퓨터학자가 되는 게 진짜 내 길인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울 때였다. 당시만 해도 카이스트 출신은 못 가는 사람 빼고 거의 전원이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대학원에 갔다. 이상했다. 스스로에게 물었다. ‘공부 아님 뭐 할래?’

선배의 제안에 덥석 ‘저 해볼래요’ 했다. 세동은 자신이 있었다. 이미 18세 때부터 코딩으로 돈을 벌었으니까. (어쩐지 과외는 하기 싫었단다. 좋아하고 잘하는 일로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카이스트 연구소 홈페이지를 만들며 첫 돈을 벌었고, 장병규의 연구실에서 코딩을 하다가, 얼결에 그가 만든 회사에 취직까지 했다. 그게 네오위즈다. 거기서 그는 훗날 2,000만 명이 사용하고 매일 현금으로만 1억 원 이상을 벌어들이던 채팅 프로그램 ‘세이클럽’을 만들게 되는데.

당시 네오위즈는 인터넷 접속 간편화 프로그램 ‘원클릭’으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인터넷 벤처였습니다. 출시 첫해에만 5억 원, 이듬해 85억 원의 매출을 올릴 정도로 잘 나가는 회사였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어요. 이용자들이 인터넷에 오래 머물러야, 돈을 더 버는 비즈니스 구조상, 유저들을 웹에 잡아 둘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야 했습니다.

사실 큰 고민의 여지는 없었다고 해요. 당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이유로 인터넷을 했거든요. 음란물을 보거나, 채팅을 하거나. 그래서 ‘채팅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겁니다. 개발 입장에서 처리할 용량은 적은데, 사용 시간은 하염없이 많이 쓰게 할 테니까.

실제로 그가 네오위즈에서 일했던 1998~2002년은 매일매일 당첨금이 오르는 복권이 눈앞에서 뻥뻥 터지는 듯한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제의 짜릿함이 오늘의 짜릿함으로 새롭게 경신되고, 내일의 짜릿함이 또 다른 차원으로 덮쳐오는 날들. 네오위즈 시절 이야기를 하며, 그의 눈빛은 마치 오래 오래 떠올려본 과거의 꿈결을 헤매는 듯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을 구분하려고들 하는데요. 저는 이게 (두 손바닥을 붙여 보이며) 이렇게 딱 붙어 있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몇 년을 덤벼서 안 되잖아요? 그럼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러면 좋아하는 마음이 차츰차츰 사라지기 시작하죠.

나중엔 지치고요. 한편 잘하는 일을 하다 보면, 그냥 성과가 나와요. 그럼 저절로 그 일이 좋아지죠. 잘한다 → 좋아진다 → 더 잘한다 → 더 좋아진다. 이게 선순환으로 돌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사람은 누구나 ‘잘하는 일’을 좋아하게 된다고 생각해요.”

세동씨는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이 잠기더니 대뜸 가수 장윤정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가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촬영 이한호 기자.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가 23일 서울 서초구 보이저엑스 사무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다들 모르지만 장윤정씨는 원래 록발라드 가수였어요. 1999년 강변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죠.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가 아는 그 트로트 가수가 아니었던 거예요. 당시만 해도 트로트는 어르신들의 전유물이자, 왜색 짙은 옛날 노래에 불과했거든요.

장윤정씨가 트로트 가수가 된 건, 자기가 원해서 아니었어요. 5년간의 무명생활 끝에 궁지에 몰리고 또 몰려서 음반사의 권유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부른 거였죠. 그게 2004년에 나온 ‘어머나’예요. 억지로 했는데 대박이 난 거죠. 너무 잘하니까. 근데 장윤정씨가 말하길, 그렇게 한번 터지고 나니 그 다음부터 트로트가 좋아졌대요.”

‘좋아한다’라는 상승나선이 시작되는 지점은 ‘잘한다’라는 것을, 그는 네오위즈 시절을 거치며 알았습니다.

10대 내내 물리학자가 되길 꿈꿨지만, 미련 없이 그 길을 뒤돌아설 수 있었던 이유. 한때 자신이 뛰어난 과학자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잘한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 ‘진짜 잘하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의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어요.

반면, 7세 때부터 매달렸던 컴퓨터는 달랐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고 태어나는 생래적 무기는, 강한 호기심과 이끌림 속에 자연스레 발견되는 법이니까요. 슈퍼히어로 시리즈 ‘엑스맨’의 돌연변이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죠.

커리어 그래프
chapter2

Chapter2. 빠른 성공이 맹독이 될 줄은 몰랐지

“한번 네오위즈의 성공을 맛보고 나서부턴, 줄곧 글로벌 스코어에 매달렸어요. 장병규 선배와 검색엔진 서비스 ‘첫눈’을 만들 때도, 우리의 경쟁자는 구글이었죠.

그러니 350억 원이라는 거금에 첫눈을 네이버에 매각하면서도 어쩐지 우리가 실패한 것 같은 거예요. 장병규 선배도 비슷하게 말했어요. 언론에선 대성공이라고 축하하고 있지만, 이건 아무래도 아쉽다.”

NHN의 첫눈 인수

네이버의 전신인 NHN의 첫눈 인수 소식을 전하는 2006년 7월 11일 한국일보 기사.

로켓을 타고 달나라까지 튀어오르는 듯했던 어린 날의 과속 성공은 결코 축복이 아니었습니다. 스무 살에 커리어 정점을 경험했던 게, 내내 이 됐죠. 광속으로 달려본 사람에겐, 시속 100㎞도 ‘정체’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니까요.

잘하는 일을 좋아하면서 만드는 상승나선은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었습니다. 어느 순간 몰려온 ‘권태’가 나선의 흐름을 정반대로 바꿔버린 거죠. 때 이른 성공 뒤에 찾아온 공허감, 과거를 애타게 갈망하며 깊어진 허무감은 그의 커리어에 깊숙한 ‘지루함의 골’을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2005년 이후 네이버에선 10년 동안 뭘 해도 세이클럽 때 같지가 않았어요. 줄곧 ‘뭘 해도 안 됐다’는 생각뿐이었죠. 도저히 그때 그 성공을, 그 시절을, 재현할 수 없네? 그 고통이 너무 큰 거예요. 서태지가 왜 4집을 끝으로 사라지듯 은퇴를 했는지, 그제서야 이해가 가더라고요. 뭘 해도 재현할 수 없으니까.”

2007년, 아이폰? 그게 뭔데?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데?

2007년, 스티브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나왔다.

그는 손바닥만 한 화면을 들고 말했다. 데스크톱도, 노트북도 필요 없어지는 시대가 온다고.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손에 들려 있는 저 작은 화면, ‘스마트폰’을 쓰게 될 거라는 얘기였다.

웹 개발자로 10년을 살아온 남세동의 귀엔 호들갑에 불과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야단스럽고, 실없는 소리라고. 이 바닥에서 ‘패러다임을 바꿀 새로운 테크놀로지’로 소개되는 것들이 으레 그렇듯, 1년을 못 갈 유행에 불과하다 여겼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그 후로 5년, 소프트웨어 세상은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다. 오직, 모바일의 세상이었지. 거기서 그는 하염없이 뒤처지고 있었다.

“자기 분야에 한번 깊이 몰두해 본 적 있는 사람들은, 변화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여요. ‘저거, 절대 별거 아니다’ 저 역시 2007년에 아이폰을 보면서 그런 말을 했었죠. 크게 얻어맞았죠. 나중에야 알았어요. 아이폰을 무시한 건 진짜 엄청난 실수였구나.”

애플컴퓨터 CEO인 스티브 잡스가 2007년 1월 9일 아이팟 기능이 포함된 휴대폰 '아이폰'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로이터

애플컴퓨터 CEO인 스티브 잡스가 2007년 1월 9일 아이팟 기능이 포함된 휴대폰 '아이폰'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로이터

세동씨는 언젠가 자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왜 그토록 거세게 모바일을 거부했을까?’라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일종의 자기 방어 기제 같은 거였죠. 당시 그는 10년 넘게 웹 개발 분야에서 ‘날고 기어 본’ 도사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성공해, 그 경력을 몇 줄 읊는 것만으로도 ‘수퍼개발자’라는 꼬리표가 붙은 권위자였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7인치짜리 장난감 같은 기계가 등장해서는 이제 너의 시대는 끝났다는 겁니다.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거센 애착을 가지고 있던 나의 분야가 곧 ‘종말’이라니. 어느 누가 그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인간은 누구나 합리화를 하기 때문에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건데요. 이 ‘자기 방어 기제’를 자의로든 타의로든 깬 사람들이야말로 위대해져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스스로 못 깨죠. 도저히 괴로워서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겨우 깨질까 말까인데, 저에겐 네이버에서 셀프카메라 애플리케이션 B612를 만드는 게 그랬어요. 적당한 스트레스로는 세계가 깨지지 않아요. 죽도록 괴로워야 깨지지.”

회사에선 등을 떠밀었습니다. ‘모바일의 시대니, 휴대폰용 카메라앱을 만들어라.’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만들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죠. ‘그래, 이렇게 소름 끼치게 하기 싫은 일이면 빨리 해치워버려야지.’ 그렇게 출시한 앱이 1년 만에 글로벌 사용자 1억 명을, 2년 만에 5억 명을 달성하게 될 줄은 몰랐죠.

“B612를 성공시키면서 알게 됐어요. 모바일을 거부했던 내가 틀렸던 거구나. 죽도록 하기 싫은 걸, 정말 억지로 해내면서, 근데 그걸 잘 해내면서 제 안의 의심과 거부감도 함께 깨진 거죠. 세이클럽 이후 10년 동안 ‘글로벌’만 외쳤는데, 그걸 이룬 셈이기도 했어요. 제일 하기 싫었던 일에서요.”

하지만, 하기 싫은 일로 스스로를 증명해보이는 과정에서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쓴 탓일까요. ‘이 뒤에는 과연 어떤 풍경이 있을까’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20년 동안 걸어온 ‘개발자’의 길 위에서 더 가보고 싶은 장소도, 더 닿아보고 싶은 목적지도 없었죠. 더는 신기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는 상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브루즈칼리파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63빌딩 하나 정도는 세워보니, 더 짓고 싶은 빌딩이 없어지더라’고요.

2015년, 서른 다섯, 백수가 되어보기로 결심하다

1998년에 네오위즈의 인턴으로 커리어를 시작해 2015년 네이버를 퇴사하기까지, 개발자로 산 세월은 거의 20년. 나이는 서른다섯이었지만, 그의 커리어는 나이에 비해 빨리 늙어 있었다. 그때까지 남세동의 삶을 채운 건 오직 일뿐이었으니까. 하루하루에 이틀치, 사흘치의 밀도를 부었으니까.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은퇴를 앞둔 이의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시간을 빽빽하게 살면, 그만큼 스스로 조로했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문득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지쳐서라기보단, 궁금했다. 일을 하지 않는 인생은 어떨까. 일을 하지 않는 그의 삶에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길지 궁금했다.

퇴사 후, 세동씨는 ‘나는 과연 백수로 살 수 있을까’를 실험해봤습니다. 남들은 흔히 다 하는데, 혼자만 못해 보고 산 것들을 하나씩 해 봤죠. 여행 가고, 요리하고 심지어 끼니까지 거른 채 게임으로 밤도 새어봐도 아주 ‘반짝’ 재밌고 말더랍니다.

회사를 등지며 딱 하나, 스스로 약속한 게 있었는데요. ‘절대로, 다신 개발하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개발자로는 완벽하게 은퇴하고자 했죠.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저에게 개발은 완전히 말초적인 자극이거든요. 마약 같은 것. 일단 개발을 한번 시작하기만 하면, 분명 이거밖에 안 할 거라는 걸 스스로 너무 잘 알았어요. 또 중독되겠지. 또 완전히 여기에만 몰입된 삶을 살겠지. 그러려고 회사 나온 게 아니니까. 쳐다도 안 봤어요. 언제라도 개발을 다시 시작하면 미친 듯이 밤 새우고, 밥도 안 먹고,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코딩만 할 걸 아니까요.”

절대로 다시 개발 같은 건
하지 않겠다 생각했지만,
인생이 어디 맘대로 되나?

모든 종류의 몰입은 자기 파괴적인 부분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몰입은 사람을 서서히 미치게 하고, 좀먹게 하죠. 세동씨는 그걸 너무 잘 알았어요. 중독의 위험을 알았기에 도망쳤지만, 인생이 어디 마음대로 되나요.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강력한 도파민을 어느 순간부턴 갈망하기 시작했죠.

그때 그의 두 눈앞에 등장한 게 ‘인공지능’이었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이긴 2016년이었죠.

  • 이세돌과 알파돌의 대전
  • 이세돌과 알파돌의 대전 이후 한국일보 1면

2016년 3월 9일부터 15일까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라고 불리는 이세돌 9단과 AI 알파고의 대국이 펼쳐졌다. 최종 결과, 알파고가 4승 1패로 이세돌에게 승리했다.

“’인공지능? 딥러닝? 이게 도대체 뭔데?’ 하면서 들여보다 보니, (하하 웃는다) 저도 모르게 다시 코딩을 하고 있더라고요.

백수였겠다, 할 일도 없겠다, 온종일 인공지능 공부만 했어요. 거의 일주일을 외출도 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던 거 같아요. 매일 똑같은 밥만 먹고 잠도 안 자가면서. 가장 안 하려고 했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인정했어요. 나는 진짜로 개발에 미친 사람이구나. 난 세상에 컴퓨터랑 둘이 남겨져도 살 사람이구나. 백수가 되어서 하니, 또 그게 그렇게 즐겁고 재밌어. 그때 백수할 생각을 접었어요. 난 백수가 체질에 안 맞는다. 다시는, 감히 개발과, 컴퓨터와 헤어질 생각을 하지 말아야겠다.”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가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촬영 이한호 기자.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가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촬영 이한호 기자.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가 23일 서울 서초구 보이저엑스 사무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개발의 ‘마약 같은 즐거움’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저에게 개발은 곧 ‘문제풀이’예요.빌게이츠가 기후 문제나 기아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게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단, 그저 그 사람에게 그게 가장 난이도가 높은 문제풀이 대상인 거거든요.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도전의식이 생기는 거고요.

선한 영향력을 만들겠다는 공명심보다도 이 문제를 푸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는 거죠. 저는 대체로 서비스 사용자들이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불편함을 보면 참지를 못해요. 그걸 보면 ‘대체 저걸 어떻게 해결하지?’로 연결되죠.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저한텐 코딩인 거고요”

그에게 개발의 즐거움은 답을 구하는 쾌감이었던 거죠. 그에게 세상은 곧 풀어야 할 문제로 가득한 세계였다는 걸, 회사를 나와보고 나서야 알게 됐죠. 그래서 새롭게 마음을 사로잡은 두 가지 문제에 남은 인생을 걸어보기로 합니다.

하나가 ‘인공지능’, 또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없었던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었죠.

커리어 그래프
chapter3

Chapter3. 100억짜리 실패로 시작된 창업,
그 후로 나의 머리를 지배한 질문

2017년 - 창업의 시작은 화려했지, 100억짜리 투자파기 사건의 전말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창업하겠다고 나서니, 선뜻 남세동에게 ‘100억 원’이란 거금을 주겠다며 나선 투자자가 있었다. 10억, 20억 원은 따지고 망설일 만한 돈이었지만 100억 원은 얘기가 달랐다. 제대로 마음먹지 않고서야 쾌척하기 힘든 수준의 거대한 돈.

동반자를 구하고 회사의 꼴을 겨우 갖춰가던 어느 무렵, 수상한 제목의 메일 한 통이 들어와 있었다.

‘투자 하지 않음을 결정’.

100억 투자는 없던 얘기로 하자고, 외국출장을 떠나는 바람에 만나서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없다는 통보였다. 사정을 들어볼 기회도, 시시비비를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이토록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투자파기라니. 배를 띄워보기도 전에, 마른 하늘에 벼락을 맞아 난파선이 된 꼴이었다.

“사람들이 나무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허술했냐는 거죠. 기본적인 계약서 검토로 제대로 안 했냐고. 그게 사실 오히려 반대였어요. 계약서 검토만 너무 열심히 한 거죠. 후회되더라고요. 그 시간에 차라리 사람을 볼 걸. 투자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 주변인들은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오히려 그걸 살폈어야 했는데. 돈과 같은 숫자, 계약 같은 서류만으로는 보장할 수 없는 장담할 수 없는 어떤 엄청나게 중요하고 커다란 게 있다, 그게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세동씨는 그때 알았습니다. 서류는 신뢰가 깨졌을 때 기댈 마지막 방어선일 뿐임을. 더 중요한 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 믿음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걸.

세동씨가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투자 파기 사연은 큰 화제가 됐고, 이 일은 오히려 보이저엑스의 이름을 널리 알린 스피커가 됐죠.

사실 여기까지는 스타트업계에 몸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입니다. 2017년 4월, 당시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였으니까요. 해프닝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게 아니냐 시선도 있었지만, 당시 그는 ‘사람이 정말로 괴로우면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페이스북에 글 쓴 건, 순전히 ‘나 투자 날아갔으니, 창업에 관해선 아무것도 물어보지 말아라’라는 취지였어요. 그때 제 팔로어가 많아봤자 200명 수준이었으니까.

투자가 깨진 날 아침에 너무 막막해서 (잠깐 숨을 고르고) 장병규 의장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의장님, 저 너무 괴로워서 산에 들어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의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일단 정신부터 차려라. 산에 들어가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러면 너에 대한 평가는 딱 거기까지가 될 거다. 일이 터지면 회피하는 사람이 된다’는 거죠.”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가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촬영 이한호 기자.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가 23일 서울 서초구 보이저엑스 사무실에서 본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장병규 의장은 세동씨에게 ‘이건 오히려 진짜와 진짜가 아닌 것을 가려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여유가 있을 때 ‘척’을 하기 마련인데, 마음의 여유든 경제적 여유든 자기가 가진 곳간이 동나면 그 밑바닥에 자신이 진짜 지키고자 하는 것이 보인다고요.

아주 힘들어도 끝끝내 자신이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볼 수 있는 기회. 그때, 당신의 바닥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세동씨에게 물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첫번째, 나에게 돈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는 것. 100억 원짜리 투자가 깨졌는데 그 100억 원에 대해서는 단 한 푼도 아쉽지 않은 거예요. 어차피 내 돈이 아니었고, 내 창업이 망하면 그걸로 전부니까. 두 번째는 사람에 대한 책임. 당장 죽을 만큼 힘든 건, 나를 믿고 따라와준 동업자 5명을 책임지지 못할 것 같다는 죄책감 때문이었고요.

세 번째는 두려움이었어요. 내가 이대로 망하면 영원히 ‘실패한 놈’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다는 무서움이요.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가능한 실패의 경우의 수 중 가장 최악의 버전을 제가 이미 보고 시작한 셈이더라고요.”

커리어의 귀인

남세동의 귀인 - 크래프톤 장병규 의장

장병규의장

잘나가던 청년 시절 리더,
가장 어려운 시기 귀인이 되어주다

장병규는 누구?

1세대 벤처기업인이자, 현 크래프톤 이사회 의장. 현세대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1순위로 꼽는 우상이자 한국 인터넷 역사의 아이콘(icon)과도 같은 인물이다. 인터넷 기업 '네오위즈'를 시작으로, 검색엔진 '첫눈'을 창업했고, 첫눈을 네이버에 350억 원에 매각한 후, 벤처투자기업 '본엔젤스'와 게임사 '블루홀스튜디오(현 크래프톤)'을 만들었다. 카이스트의 전신인 한국과학기술대(KIT) 전산학과에 입학해 같은 대학에 박사과정을 마쳤다. 이곳에서 청년 남세동과 만났다.

남세동과의 인연?

1996년, 18세 남세동과 카이스트 컴퓨터동아리 '스팍스'에서 처음으로 조우했다. 개발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던 남세동을 네오위즈의 인턴으로 채용했다. 그곳에서 남세동이 '세이클럽'을 만들었다. 이후로도 두 사람은 검색엔진 '첫눈'을 함께 제작했는데, 2006년 첫눈이 네이버로 매각되며, 장병규 사단의 대표주자였던 남세동 역시 네이버로 적을 옮겼다.

그로부터 12년 후, 2017년 다시 만나 인공지능 스타트업 '보이저엑스'를 공동창업했다. 장병규 의장은 남세동이 위메이드의 100억 투자 파기 사건으로 인해 고역을 치르고 있을 때, 그에게 150억원을 쾌척했다. 현재 보이저엑스와 크래프톤은 같은 건물에서 위아래층을 맞댄 이웃이다.

그도 그럴 게, 훗날 장병규 의장의 재투자를 못 받았다면 자본주의적으로 그의 실패는 100억 원짜리로 기억될 것이었습니다.

바닥을 잘 찍고 올라오면 외려 그만큼 거세진 맷집, 우람해진 용기가 생긴 다죠. 이미 ‘최악’을 경험했으니, 더는 부끄러울 게 없었던 셈이죠. 그가 바닥을 긁으며 자신의 심연을 보고 있을 때,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세상 밖으로 꺼내준 건 다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보이저엑스라는 회사를 만들며 내 머리를 지배한 세가지 질문

19세 때부터 남세동은 팀장이었다. 20년 동안 끊임없이 사람과 부대끼며 일했다. 80명이 넘는 팀을 이끌어도 보고, 팔자에 없다 여겼던 회사까지 차려보며 알았다. 조직에 맞는 인간 같은 건 따로 없다는 사실을. 군대에서 말뚝 박는 게 타고난 천성이자 체질인 사람이 없는 것처럼, 회사생활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누구나 ‘유아독존’으로 산다. 내 눈에 좋은 걸, 내 성에 차게, 내가 하고 싶은 만큼만 만들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니까.

그래서였다. 남세동에게 남은 인생을 걸고 싶을 만큼, 가장 중요한 문제풀이는 ‘지금껏 다녔던 회사들과는 구조적으로 다른 회사를 만드는 것’.

일하는 내내, 그 역시 회사를 다니기 싫었기 때문이다. 대표가 된 그에게 직원은 거느리는 것이 아닌, 길러내는 것이다. ‘자기’ 안에 갇혀 일하는 이들이 ‘서로’를 보게 하고, 각 톱니의 날을 살려 결국 잘 굴러가게 하는 것. 같은 일을 도모하는 이들이 거슬림 없이 어울리는 둥지를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보이저엑스에 건 가장 중요한 미션이다.

“사람은 배고픕니다. 사람은 두렵습니다. 사람은 외롭습니다. 사람은 심심합니다. 사람은 궁금합니다. 사람은 멋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일을 합니다. 그리고 태양계 밖으로 탐사선을 보내는 기적을 이룹니다.”

보이저(Voyager) X, ‘미지의 X를 향해가는 탐사선’이라는 뜻의 회사 이름을 떠올리며 세동씨가 직접 쓴 이 회사의 캐치프레이즈입니다. 모든 문장이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물결 위에서 뛰어난 기술과 품질을 자랑하는 서비스를 만드는 건 두 번째 목표고, 자신이 바라는 최우선의 목표는 ‘사람이 모여 좋은 에너지를 만들며 일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드는 것이라고요.

“누구나 입버릇처럼 ‘일하기 싫다’고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 일이 사라지면 어떨 것 같은가 생각해보면요. 인간은 생각보다 일 없이 못 살아요. 돈의 욕구가 해결되더라도 인간은 그 이상의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자꾸 일을 해요. 스티븐 스필버그가 왜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까요? (최근 스티븐 스필버그는 35번째 장편영화인 ‘파벨만스’를 공개했다.) 돈은 벌 수 있을 만큼 벌었을 텐데요. 그 일에 자아가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돈 이상의 욕구,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회사여야 한다고 봐요. 누구든 자신이 가진 뭔가를 펼쳐낼 수 있는 곳,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죠.”

  •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와 직원들
  •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와 직원들

남세동 보이저엑스 대표가 23일 서울 서초구 보이저엑스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남세동 대표는 일과 중 많은 대다수의 시간을 직원들과 대화를 하거나 논의를 하며 보낸다. 이한호 기자

자아만 가지고 자아 실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자아를 실제로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을 펼쳐낼 공간이 필요하죠. 그걸 펼쳐낼 공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일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한자어로 ‘인간(人間)’이라 칭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사람에겐 일이, 일하는 사람에겐 회사라는 공간이 필요하죠. 세상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에 느끼는 만족감이 쌓이면서, 자아가 견고해질 테니까요.

“인간에게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자아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자아가 필요로 하는 공간 역시 다르다. 누군가는 정치 영역이 자아 실현의 장일 수 있고, 누군가는 학계가 자아 실현의 장일 수 있다. 각자가 진입한 자아 실현의 장 속에서 개개인은 인정 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대체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곧 자아 실현의 과정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보이저엑스 역시 훌륭한 자아 실현의 장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 보이저엑스 채용페이지에서 발췌

지금껏 다녔던 회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구조, 문화의 회사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던 세동씨는 2017년 본격적으로 닻을 올리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그가 이끄는 보이저엑스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요.

‘제품만큼 사람 역시 좋은 회사’를 만들기 위한 남세동의 본격적인 여정이 기사 하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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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세동 대표 커리어 그래프

상편 목차

  • Chapter1. 열아홉에 친 ‘메가히트급’ 홈런
  • Chapter2. 빠른 성공이 맹독이 될 줄은 몰랐지
  • Chapter3. 100억짜리 실패로 시작된 창업, 그 후로 나의 머리를 지배한 질문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

<보이저엑스> 남세동 대표

카이스트를 졸업 한 후 1998년 네오위즈에 인턴으로 입사해 채팅 서비스 ‘세이클럽’을 개발했다. 장병규 크래프톤 의장과 첫눈을 세우기도 했다. 네이버에서 셀카앱 ‘B612′을 개발했다. 2017년 보이저엑스를 창업했다. 보이저엑스는 <브류>, <온글잎>등 AI 기술 기반의 B2C 서비스를 선보이는 AI 인공지능 기술 전문 스타트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