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가 꽃이고 숲이더라... 바라만 봐도 좋은 산 굳이 오른 이유

입력
2022.11.16 04:30
20면
<181> 영암 월출산과 주변 관광지

드넓은 벌판에 홀로 우뚝 선 영암 월출산은 어디서 봐도 수려하다. 목포에서 순천으로 이동하든, 나주에서 강진으로 달리든 동서남북 어디서나 모습을 달리하며 웅장한 자태를 자랑한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은데 힘들게 왜 올라가?’ 영암을 지나칠 때면 속으로 늘 이렇게 위안을 삼곤 했다. 솔직히 한 번 올라보고 싶지만, 가파른 바위 능선을 보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지난 10일 미뤘던 숙제를 하듯 월출산에 올랐다. 그렇게 절경이라는 구름다리까지는 가봐야지 했다가, 정상까지 발을 디뎠다. 힘든 만큼 멋진 풍광으로 보상받은 산행이었다.


구름다리서 ‘더 이상은 못 가’ 하다가 결국은

월출산은 전체 면적이 56.22㎢로 국립공원으로는 가장 작다. 정상인 천황봉(809m)까지 가는 탐방로는 5개, 천황사에서 정상을 거쳐 도갑사까지 가는 동서 종주 코스(9.5㎞)를 제외하면, 대개 왕복 6~7㎞로 짧은 편이다. 일반적인 산행이라면 2시간 안팎 거리지만, 월출산국립공원 홈페이지에 제시된 시간은 4시간이다. 충분히 휴식하며 여유롭게 걸으면 5시간 넘게 걸린다.



등반객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는 천황사에서 산 중턱의 구름다리까지 왕복하는 길이다. 3㎞로 2시간을 잡는다. 초입의 천황사까지는 대체로 순탄하다. 월출산 조각공원과 천황야영장 주변에 물든 늦가을 단풍에 발걸음이 가볍다.

야영장을 지나면 윤선도 시비와 가수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노래비가 나란히 서 있다. 시비에는 보길도로 유배 가던 윤선도의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월출산 높다더니 미운 것이 안개로다. 천황제일봉을 일시에 가리니, 두어라 해 펴진 후면 안개 아니 거두리.' 수려한 봉우리를 가리는 안개를 간신에 빗댄 내용이라 해석한다. 어쩌면 윤선도도 이곳부터 가팔라지는 산세에 감히 발을 들이지 못한 구실을 찾은 게 아닐까.

천황사는 월출산 동쪽 산자락 좁은 터에 자리 잡았다. 고려 초기 사자사(獅子寺)로 시작된 사찰이지만, 지금은 2001년 화재 이후 새로 지은 전각 3채가 전부다. 오랜 역사에 비하면 수수한 절간이다.

천황사를 지나면 길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다. 구름다리로 가는 탐방로에 돌길과 계단이 이어지는데, 체감상 가파르기가 수직에 가깝다. 가벼웠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정상까지 가보겠다는 호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구름다리까지나 갈 수 있을지 염려할 지경이다. 바위 사이에 단풍이 곱지만 눈길을 끌지 못한다. 고작 900m를 걷는 데 40분 넘게 걸렸다.

구름다리에 당도하면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탄성으로 바뀐다. 주변 전망까지 더해 과연 월출산의 명물이다. 54m에 불과한 짧은 다리지만 등산객에게는 획기적으로 다리품을 줄인 고마운 존재다. 해발 510m에 위치한 다리는 높이 120m 협곡에 매달려 있다. 이 다리가 아니면 사자봉 등산이 그만큼 더 힘들었을 거라는 얘기다.





다리 좌우로 펼쳐지는 풍광 또한 압권이다. 왼쪽으로 사자봉이 우뚝하고, 오른쪽 건너편으로 육형제봉이 하얗게 능선을 형성하고 있다. 정면은 수직의 바위절벽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다. 까마득한 발아래 좁은 계곡에 단풍이 제법 고운데, 3면으로 둘러싸인 기암괴석에 압도돼 주목을 끌지 못한다. 바위가 풀이고 나무고 숲이다. 꽃이고 단풍이다. 웅장하면서 섬세하고, 아찔하면서 기기묘묘해 어떤 이는 남성적이라 하고 어떤 이는 여성적이라 평가한다. “아래서 봐도 좋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더 좋기 때문”에 오른다던 어느 등산객의 말에 절절히 공감할 장관이다.

이만하면 됐다 판단하고 하산하려 하는데, 길동무를 자처한 이영학 영암군청 건설지원팀장이 아쉬움이 남지 않겠냐며 한마디 던진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올라온 길에 비하면 완만한 편입니다.” 한 해 10여 차례 월출산을 오르는 베테랑의 조언이니 힘을 내 보기로 했다. 가장 가파른 사자봉 코스 대신 바람폭포와 육형제봉 전망대를 거쳐 가자고 제안했다. 구름다리에서 올라온 반대 방향으로 끝없이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는 길이다.



가파르기가 아찔하지만 바닥까지는 수월하게 내려갔는데, 바람폭포까지는 또 그만큼 올라야 한다. 바람폭포는 높이 15m의 암벽에서 떨어진다. 수직의 물줄기가 골짜기에서 치받는 바람에 흩날린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장엄한 물줄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실처럼 가는 물줄기 몇 가닥이 겨우 흘러내릴 뿐이었다.

폭포에서 가파른 돌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육형제봉 전망대다. 왼쪽으로 여섯 개 바위봉우리가 기묘한 모양으로 능선을 이루고, 정면으로 지나온 구름다리가 눈 아래 밟힌다. 구름다리를 중턱에 두고 골짜기에서 솟구친 사자봉이 아찔하고도 우람하다. 전망대에서 또 조금만 가면 산 능선이다. 맞은편으로 드넓게 펼쳐지는 평야가 월출산의 깊은 바위 골짜기와 대조적이다.

이제 정상까지 약 600m 남았다. 길동무는 ‘사실상’ 평지나 마찬가지라 했지만 경사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딱 한 구간, 아주 짧게 평평한 길이 있긴 하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해피로드 15m’다. 이 탐방로에서 유일하게 평평한 길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바위 사이를 통과하는 통천문까지는 다시 한번 고비다.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신발이 계단에 쩍쩍 달라붙는 듯하다. 통천문을 지나 짧은 내리막과 오르막을 거치면 드디어 정상이다. 서편으로 펼쳐지는 산세는 지나온 구간과 또 다른 풍광을 선물한다. 구정봉 기암 너머로 영산강 하류 물길이 아련하게 보인다. 북쪽 영암 읍내 방향으로 펼쳐지는 평야도 끝없이 넓어진다.



영산강 수면에 떨어지는 햇빛이 점점 붉은 기운을 띤다. 노을이 장관일 듯한데 마냥 넋을 놓고 기다릴 수 없다. 이미 오후 4시가 넘은 시간,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하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산을 내려와 운동 기록 앱으로 확인하니 5시간 22분 동안 6.83㎞를 이동했다. 휴식과 사진 찍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꼬박 4시간 이상 걸은 셈이다. 월출산은 거리에 비해 체력 소모가 많은 산이다. 마음의 준비 못지않게 장비도 꼼꼼히 챙겨야 한다. 탐방로에는 물을 받을 곳이 없다. 생수는 2통 이상, 등산화와 스틱은 기본이고, 무릎보호대를 착용하면 급경사를 오르내릴 때 도움이 된다.

먼발치서 월출산 바라보기

영암의 주요 관광지도 월출산 주변에 몰려 있다. 동북쪽 덕룡산 자락에 덕진차밭이 있다. 완만한 경사지에 조성된 차밭 아래로 평온하게 마을과 들판이 펼쳐지고, 그 끝에 월출산 능선이 그림처럼 걸린다. 요즘은 녹차꽃이 한창이다. 녹색 융단이 펼쳐진 차밭에 벌들이 잉잉거린다. 덕진차밭은 아직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았다. 차밭 위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고, 정자 하나를 지어 놓았을 뿐이다. 한적하게 소풍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읍내 ‘월출산 기(氣)찬랜드’는 영암의 대표 관광지다. 천황사까지 월출산 자락으로 기찬묏길이 연결돼 있고, 가야금산조기념관, 한국트로트가요센터, 조훈현바둑기념관, 영암곤충박물관 등의 시설이 모여 있다.

한국트로트가요센터는 영암을 대표하는 하춘화의 60년 가수 활동을 전시하고 있다. 부친이 딸이 데뷔한 1961년부터 50여 년 모은 자료를 영암군에 기증해 탄생한 공간이다. 193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트로트의 흐름을 한눈에 이해할 수 있는 역사관과 명예의 전당 등으로 구성된다.

테마공원으로 꾸민 가야금산조기념관은 영암 출신 김창조(1865~1919) 가야금 명인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공간이다. 19세 때부터 판소리 가락에 민속 장단인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장단을 짜 넣어 가야금 산조의 틀을 만든 인물이다. 기념관은 가야금과 관련한 유물을 전시하고, 국악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체험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월출산 서쪽 자락 군서면에는 구림전통마을이 있다. 소담스러운 마을길을 따라 걸으면 400년 넘은 고택과 정자를 만날 수 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군립 하정웅미술관은 내년 3월까지 ‘현대미술의 거장’ 전시를 열고 있다. 시골 미술관답지 않게 샤갈과 루오, 달리 등 유명 작가의 작품을 다수 전시 중이다. 마을 어귀에는 상대포공원이 있다. 백제시대에 왕인 박사가 일본에 천자문을 전한 곳이자, 통일신라시대에 중국과 교류가 활발했던 포구라 한다. 지금은 주변이 농경지로 변했고, 아담한 연못을 따라 산책로를 조성해 놓았다.




마을에서 약 4㎞ 떨어진 곳에 도갑사가 있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지었고 고려 후기에 크게 번성했다는 절이다. 한국전쟁 때 대부분 건물이 불에 탔지만, 입구의 해탈문은 살아 남아 국보로 지정됐다. 석조 계단을 올라서면 사천왕상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를 띤 금강역사와 문수보살이 앉아 있다. 지난 11일 도갑사로 가는 도로에는 단풍잎이 발갛게 떨어지고 있었다.

영암=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