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만화, 슬램덩크 열풍

입력
2023.01.11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일본 농구 만화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30·40대 남성 관객의 추억을 강타하고 있다. 지난 4일 개봉한 뒤 6일 만에 50만 인파가 새해 극장가를 덮쳤을 정도다. 이들의 반응은 압도적인 ‘반가움’이다. “심장이 뛴다” “기억 저편에 숨겨둔 명장면들이 살아났다” 같은 찬사가 쏟아진다. 남성 관객이 여성 관객 수를 넘어서는가 하면 홀로 영화관에 온 비중이 49.8%라는 수치도 눈길을 끈다.

□ 1990년대 X세대 문화의 한 축으로 일본 만화를 빼놓을 수 없다. 슬램덩크는 1990년 연재를 시작해 1996년 완결됐다. 일본에서 1억 부 이상이 팔렸고 국내에도 번역돼 1970~80년대생에겐 스포츠 만화의 전설이나 다름없다. 당시 학생들에겐 일종의 성장통이랄까, 성장 만화로 불릴 만한 셈이다. 좁디좁은 만화방에서 라면과 함께 만화책장을 넘기는 짜릿함은 그 시절 흔한 경험이었다. 남학생들은 무협지류를 좋아했고, 여학생들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 가득한 순정만화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빠져들었다.

□ 슬램덩크는 등장인물의 그림만 봐도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시원하고 강렬하다. 탁월한 데생능력에 역동적 장면처리가 일품이다. 정지된 컷임에도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생생함, 캐릭터의 표정과 땀방울까지 순간 묘사가 만화예술의 특장점을 마음껏 과시한다. 여학생에게 50번 차인 불량학생 강백호(원작에선 사쿠라기 하나미치)에게 채소연이 던진 첫 마디는 “농구 좋아하세요?”였다.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다” 역시 기억에 남는 명대사다. 열정과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강백호와 동료들의 무모한 전국제패 도전기는 가장 멋진 실패를 보여주지만 과정에서 드러난 감동은 기대를 넘어섰다.

□ 한류 만화가 일본 만화의 아성을 위협하고 추월한 마당에 슬램덩크의 부활은 한일관계 전체를 조망할 때 반가운 일이다. 어느 나라건 융성했다고 잠시 느슨해지면 뒤처지긴 순식간이다.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계획의 첫 모델이 필리핀이었다는 사실을 젊은 세대는 모를 것이다. 서로 자극받고 영향을 주고받는 게 인접 국가다. 평화공존이 중요하단 얘기도 된다. 옆에서 어깨를 맞대야 할 운명에 서로 민감하게 문화를 주고받는 현실을 새삼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작지 않을 것이다.

박석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