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담

“재벌 주도 성장정책으론 ‘잃어버린 30년’ 못 피한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은 문재인 정부 실패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문재인 정부는 공정과 성장의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며 소득주도성장이니 혁신성장이니 하며 갈팡질팡하다가 분배에서도 성장에서도 요란한 구호에 비해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현 정부는 어정쩡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경제정책 방향을 민간의 경제활력 회복과 성장으로 확실히 전환한 상태다.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 게 낫다는 점에서 윤석열 정부의 정책 전환엔 타당성이 있다. 성장 잠재력의 지속적 하락과 눈앞에 닥친 경기침체 극복을 위해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다만 성장을 위한 선택이 과거 재벌과 주력산업 의존적 성장정책을 답습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많다. 오랜 재벌개혁론자인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여전히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재벌과 주력산업에 의존하는 경제로는 아무리 따져봐도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이런 식으론 당장 급한 불을 꺼도 장기적으론 일본식 ‘잃어버린 30년’을 피해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최근 ‘지속 불가능 대한민국’이라는 책을 냈다. 어떤 얘기인가. “현재 우리 산업구조와 기업소유지배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혁신경제로의 이행, 양극화 해소, 탄소중립 달성 등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이 경우에 한국 사회와 경제는 불안정과 장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지속불가능’을 거론한 것이다. 산업 구조개혁과 혁신경제를 위해 재벌(대기업집단) 개혁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지금 우리 경제에서 재벌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현안인가. “그렇다. 되레 이전보다 더 절실해졌다. 문재인 정부에서 재벌개혁 한다고 어설프게 나섰다가 결국 실패한 게 일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다. 10대 대기업집단 매출만 봐도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1,070조 원에서 2021년 1,209조 원으로 늘어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중이 55.6%에서 58.3%로 늘어났다. 재벌 경제력 집중이 더 강화된 것이다. 그럼에도 변죽만 울린 재벌개혁에 대한 반동으로 윤석열 정부는 시장경제와 민간 주도 성장을 내세우며 또다시 재벌과 대기업집단에 의존하는 경제활성화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니 재벌개혁이 이전보다 더 절실해진 셈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수출시장 격변에 대한 대응이 절실하고, 국내적으로도 경기침체 극복이 당장 시급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만만찮다. “집에 불이 나서 방과 지붕에까지 번졌다고 치자. 방과 지붕의 불만 끈다고 이전처럼 살 수 있나. 아니다. 어차피 기초부터 기둥까지 새로 다지고 세워서 집을 새로 지어야 살 수 있다. 지금 정부는 번지는 불을 당장 꺼야 한다는 다급함에서 경기활성화 효과를 빨리 낼 수 있는 대기업집단 규제완화나 R&D 지원 등을 통한 투자 촉진에 힘을 쏟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여서는 안 된다. 재벌체제를 개혁해서 산업 전반에 창조적 파괴와 창의적 혁신이 원활히 일어나도록 해야 장기적인 성장동력을 구축해나갈 수 있다. 따라서 단기 경기활성화 정책이 급해도 재벌개혁을 통한 산업 구조개혁이 병행 추진돼야 한다는 얘기다.” -대기업집단 역시 혁신을 추구한다. 더욱이 양질의 정보와 충분한 자원, 효율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재벌이라고 창조적 파괴나 창의적 혁신에 나서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삼성전자의 경우 사내 벤처 육성프로그램인 ‘C랩’을 통해 창의적 혁신을 추구하는 걸 안다. 하지만 대기업집단의 수직적, 유기적 의사결정 체계 안에선 밖에서보다 창의적 혁신이 관철되기 어렵다. 모토로라가 애플에 뒤처진 이유는 혁신 아이디어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다. 삼성전자보다 훨씬 앞서 모토로라도 이미 사내 혁신 랩을 가동했고, 거기서 애플 아이폰보다 훨씬 일찍 터치스크린 개발안이 나왔다. 하지만 모토로라나 노키아는 터치스크린 방식의 휴대폰은 고가이므로 수요가 적을 걸로 예단해 지속 개발을 포기했다. 그게 터치스크린의 새 장을 연 애플에 시장을 넘겨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애플은 ‘벌판’에 있었기 때문에 끝내 혁신을 이룬 거다. 그렇다면 왜 모토로라나 노키아의 혁신이 실패했을까. 경영진의 판단 미스도 있었지만, 사내 조직 간 이해충돌을 더 큰 원인으로 꼽는 시각도 만만찮다. 한쪽에서 터치스크린으로 가자고 해도, 기존 버튼식 생산라인에 속한 조직들의 반대가 강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재벌, 대기업집단의 강력한 조직 내에서 혁신이 어렵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향후 5년간 삼성전자가 약 110조 원, SK그룹이 179조 원, 현대차그룹이 63조 원의 국내 투자계획을 각각 밝혔다. 대기업집단의 이 같은 선도적 투자가 우리 경제의 장기 성장동력이 되지 않겠는가. “실제 이행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일단 경제활성화와 성장동력 확충에 도움이 되는 건 맞다. 다만 이런 투자와 설비증설 등이 한국 제조업 위기를 극복하고 신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해답일 수 있느냐는 다른 문제다. 예컨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R&D 투자비중은 미국보다 훨씬 높았으나 되레 성장률은 크게 낮아졌다. 쉽게 말해 어떤 경우든 자본투입과 축적이 그에 비례하는 성장을 일으킨다는 과거의 통념은 충분히 발달한 경제에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적극적 투자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성장정체를 맞은 원인은 투자가 새로운 제품과 새로운 기술이 기존에 있던 기득권자들을 대체하는 혁신에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1990년대 이래 일본의 투자가 기존 산업과 대기업계열의 관성적 공정혁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쉽게 말해 창의적 혁신으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나는 국내 재벌의 대규모 투자 역시 그런 한계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국내 재벌체제의 한계가 그렇게 심각한가. “그렇다. 먼저, 중화학공업에 기반하고 생산공정 혁신과 가격 경쟁력에 의존하는 재벌기업 중심의 성장은 한계에 도달했다. 일본의 사례를 봐도 그러하고, 최근 경제학계의 성장이론으로 널리 수용되는 ‘슘페터주의 성장이론’을 고려해도 이는 자명하다. 둘째, 국내 중간재 시장에서 사실상 수요 독점력을 기반으로 전속계약과 단가 후려치기 및 기술탈취로 가격경쟁력을 유지하려는 재벌·대기업 중심의 하청구조는 중간재 산업의 혁신을 가로 막고 있으며, 이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임금격차와 나아가 많은 사회 양극화 문제의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화학공업 중심의 재벌체제에서 탄소중립으로 이행은 불가능하다. 재벌개혁은 산업 구조개혁을 유도해서 혁신경제, 포용성장, 탄소중립이 가능한 경제 사회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슘페터주의적 성장이론(Schumpeterian Growth Thoery)의 요점을 소개한다면. “창조적 파괴자로 유명한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의 주장을 발전시킨 성장이론이다. 신고전파 성장이론인 ‘AK 모형’에서 물적, 인적, R&D 자본이 경제성장을 견인한다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새로운 제품과 기술이 기득권자들을 대체함으로써 성장이 일어난다고 본다.” -창의적 혁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글로벌 탄소중립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재벌개혁과 산업 구조개혁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폈다. 탄소중립 변수도 대응이 절실한가. “OECD가 제공하는 국가별 탄소생산성(GDP/에너지 관련 탄소 배출량)을 보면 탄소 배출 ㎏당 달러로 환산한 부가가치는 2019년 기준 EU와 OECD 평균이 각각 6.7과 4.9이다. 반면 한국은 3.68에 불과하다. 주요국 대비 최저 수준인 셈이다. 한국 산업구조에서 제조업, 그것도 중화학공업 비중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2020년 기준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한국이 26.1%인 반면, 일본 19.5%, EU 14.0%, 미국은 10.6%에 불과하다. 탄소 배출량을 국내 업종별로 보면 철강 석유화학 시멘트 정유 디스플레이 반도체 등 6개 업종이 전체 산업 탄소 배출량의 79%를 차지하고 있다. 수출 주력산업들이 모두 탄소 배출량이 높다는 얘기다. 반면 글로벌 교역에서는 205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달성하자는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 캠페인인 ‘RE100’이 사실상 새로운 무역 스탠더드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전 정부나 현 정부의 탄소중립 및 국가온실가스 감축 계획엔 구체적인 이행방안과 추진체계가 없어 목표 이행을 담보할 수 없는 상태다. 결국 공급망 재편 등으로 첨단 산업기반이 해외로 이전되는 가운데, 지금의 재벌, 중후장대, 주력 수출산업 의존형 산업구조를 개편하지 않으면 자칫 국내 산업기반이 공동화될 위험도 커질 수밖에 없다.” -재벌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면 핵심 방향은 무엇인가. “재벌개혁의 핵심은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다. 경제력 집중 해소가 곧 재벌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재벌들이 스스로 핵심 사업분야에 집중하도록 유인하고, 국내시장에 좀더 경쟁이 활성화되면서 중간재 산업에서 혁신의 기회가 생기고 공정한 경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유인하기 위해서 경제력 집중의 해소가 필요한 것이다. 이와 함께 기술탈취를 방지할 수 있는 징벌배상과 기술탈취 같은 공정거래 관련 분쟁 시 ‘디스커버리 제도’의 도입도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B2C 영역에서는 많은 유니콘이 나오고 혁신이 일어나나 B2B 영역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차이는 혁신의 기회와 유인의 문제이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재벌개혁을 통해 중간재 산업의 혁신을 유도하고, 이런 혁신을 통해 친환경적 산업으로 이행해 가야만 한다. 기존 재벌 대기업뿐만이 아니라 중간재 산업에서 세계적 기업이 나올 수 있어야 하며, 이른바 ‘개방형 혁신’과 진정한 원하청 협력이 이뤄지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재벌개혁이 결국 산업구조를 지속 성장이 보장되는 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것이라면, 향후 산업구조는 어떤 방향으로 개편돼야 하나. “재벌개혁뿐만 아니라, 노동, 복지, 재정 개혁을 포함한 종합적인 개혁을 통해 지속 가능한 사회ㆍ경제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에 더해 탄소중립을 위해서 정부가 추가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탄소중립으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중화학공업 중심의 산업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재생에너지 비율을 높임으로써, 국내에 입지하는 기업들이 ‘RE100’을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면 친환경적 중간재 산업이 새로이 생겨나고, 산업전환을 실행할 수 있다. 어떤 산업을 정부가 사전적으로 발굴 육성해야 한다는 개발도상국 시기 때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가 산업전환을 위한 기회와 유인을 제공하면, 구체적인 내용은 창의적이고 의욕에 가득 찬 혁신가들이 채워나간다.”

책방지기의 서가

경북 상주 여중생에게 소개한 책

지난주는 서점 옆에 있는 여자 중학교에 가서 특강을 했다. 주제는 '상주에서 좋아하는 일 하며 살기'. 3년 전 연고 없는 경북 상주에 와서 글을 쓰고 서점을 운영하며,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는 자리에 가서 내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다. 상주에서 만난 아이들 대부분은 성인이 되면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대학에 가건, 취업을 하건, 상주가 아닌 도시로 가는 것이 '더 잘 된 거'라 여기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선생님이, 선배들이 살아온, 자신들이 봐 온 익숙한 방식대로. 그런 아이들 앞에 '잘살아 보려고 상주에 왔다'고 말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별로 유난한 것 없는 내 이야기를 150여 명 앞에서 말하게 된 이유였다. 특강이 끝나고 질문 시간, 한 아이가 손을 들더니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특강 말미에 확신에 찬 사람들 속에 나를 두지 말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각자 있어야 할 자리와 살아가는 모양이 다르다고 말했다. 이런 이야기를 담은 책을 추천하고 싶었다. (사실 많은 좋은 책들에 담겨 있는 이야기다) 짧은 시간 고민하고, 아이에게 권한 책이 '레이디 맥도날드'였다. 이 책은 몇 해 전 탐사보도 프로그램에 나왔던 맥도날드 할머니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쓴 소설이다. 24시간 영업하는 맥도날드에서 밤을 보내고, 오전에는 스타벅스에 가서 커피 한잔을 오래 마시며, 꼼꼼히 영어 신문을 읽는 노숙자 할머니. 유별나긴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주인공까지 될 수 있었던 데는, 할머니의 과거가 큰 영향을 미쳤을 거다. 유명 대학을 나와 외무부에서 일했던, 잘나갔던 과거. 책에서도 그대로, 맥도날드 매장을 자신의 거실로, 때론 침실로 활용하는 윤자가 주인공이다. 윤자는 현재 자기 삶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는 것처럼, 외면하는 것으로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모를 리 없다. 끊어지지 않고 질기게도 이어지던 삶의 마지막 순간이 오자, 때때로 과거를 반추하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되짚을수록 자기 인생이 까마득해져서 그녀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이 지켜온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 남루하지만 유일한 트렌치코트를 단정하게 입고, 하루 한 끼 식사로 버터를 넣은 커피를 마시며, 산책하며 햇빛을 쬐고, 가끔 공짜 영화를 보고, 날짜가 지난 영어 신문을 읽으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끊임없이 내 기준을 들이댔다. '이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자주 질문해야 했다. 탐사보도 속, 실제 맥도날드 할머니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과거 지인들은 그녀의 현재 모습에 놀라고, 눈물을 글썽이며 안타까워한다. 자기 집에 비어있는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두 발 벗고 나서는 이도 있다. 집이 없어 바깥에서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자는 이에게 집을 준다니, 티브이를 시청하던 사람들은 모두 '이제 됐다'며 안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할머니는 완강히 거부한다. 그 방식이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이의 눈에는 과거에 갇혀 사는 허영심 많은 여자일 뿐이겠지만, 그녀의 특별함이 '평범하다고 일컬어지는 삶의 방식'만 강요하는 이 폭력적인 세계에 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사는 일의 어려움과 귀함을 아는 독자들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란다." 책의 맨 뒷장, 백수린 소설가의 추천사를 읽으며 마음이 울컥거렸다. 용기를 내 질문한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평범함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지. 우리 각자의 삶은 얼마나 다채롭고,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각자 얼마나 다른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또 한번 힘껏 깨닫기 위해, 오늘도 책을 읽고 책을 소개한다. 적어도, 내가 알고 경험한 것 바깥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 알고 싶은 이야기

한국일보의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