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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곰한 우리말

햅쌀 향 흐르는 한가위

해마다 이맘때면 동네에 은은한 햅쌀 향이 퍼진다. 한가위를 앞두고 떡집에서 흐르는 향이다. 시장 떡집들은 경쟁하듯 맛있는 향을 뿜어댄다. 떡집 주인 내외가 비닐을 깐 큼지막한 좌판에 갓 쪄낸 송편을 쏟고, 즉석에서 참기름을 바른다. 그 고소한 향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잠시 서성거리니 맛 좀 보라며 두세 알을 손에 쥐어준다. 전통시장은 인심만큼이나 손도 크다. 식구가 많은 집안은 오늘 저녁 둥근 밥상 펴놓고 송편을 빚겠다. 소쿠리 가득 전도 부칠 게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인 이들의 웃음소리가 벌써부터 들려온다. 이게 우리네 명절이다. “추석 전날 달밤에 마루에 앉아/ 온 식구가 모여서 송편 빚을 때/ 그 속 푸른 풋콩 말아넣으면/ 휘영청 달빛은 더 밝어 오고/ 뒷산에서 노루들이 좋아 울었네.// 저 달빛엔 꽃가지도 휘이겠구나!/ 달 보시고 어머니가 한마디 하면/ 대수풀에 올빼미도 덩달어 웃고/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달님도 소리내어 깔깔거렸네.” 서정주(1915~2000) 시인의 ‘추석 전날 달밤에 송편 빚을 때’이다. 달도 둥글고 상도 둥글고 깔깔거리며 웃음 짓던 식구들의 입도 둥글다. 마음도 함께 둥글둥글해진다. 이 시를 읽으면 어린 시절 추석 전날 기억이 떠오른다. 송편 찔 때 넣을 솔잎을 따러 가던 아버지는 참 젊었다. 아버지 목말을 타고 산을 내려오며 봤던 그날의 풍경도 눈에 선하다. 우리를 기다리며 전을 부치던 엄마는, 아버지와 내가 돌아오면 솔잎을 깨끗이 씻은 뒤 시루에 송편을 쪘다. 모락모락 김이 오르면 마당 가득 솔향기가 퍼졌다. 솔잎이 찍힌 갓 쪄낸 송편을 입에 넣으면 가을을 먹는 느낌이었다. 한가위에 햅쌀로 만든 송편은 ‘오려송편’이라 한다. 제철보다 일찍 여무는 '오려'는 올벼의 옛말이다. 보름달의 명절인 추석에는 햇곡식, 햇과일 등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해-’와 ‘햇-’은 ‘그해에 난’이라는 뜻을 더하는 접사다. 햇김 햇감자 햇사과 햇밤 등 예사소리 명사 앞에는 ‘햇’이 붙고, 해쑥 해콩 해팥 등 된소리나 거센소리 명사 앞에서는 ‘해’가 된다. 그런데 햅쌀은 특이하다. ‘해쌀’도, ‘햇살’도 아니다. 중세국어의 ‘쌀’엔 첫머리에 ‘ㅂ’이 있었기 때문이다. “명절 잘 쇠고 술 한잔합시다.” “한가위 잘 쇠세요.” 한가위를 앞두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던 지인들한테서도 문자 메시지가 오니 반갑다. ‘쇠다’는 생일이나 명절 등 해마다 돌아오는 특별한 날을 지낸다는 뜻의 우리말이다. 그러니 한가위나 설뿐만 아니라 환갑, 대보름 같은 날에도 쓸 수 있다. 독자 여러분도 한가위 잘 쇠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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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바라본 건

아이가 마지막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 그게 자신을 해하려는 엄마 혹은 아빠의 눈빛이라면. 20여 년 전 일가족 사망 사건을 쫓았던 경찰 간부가 수사 당시를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꺼냈다. 한 남성이 추락사해 행적을 쫓다 보니 자택에 아이와 아내가 숨져 있었다는 거다. 자세히 풀어놓을 순 없지만 사건 현장은 더없이 참혹했다고 한다. 아이가 부모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흔적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에.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일 일가족 사망 사건은, 생각보다 빈번히 그리고 처절히 발생한다. 최근엔 영암에서, 대전에서, 인천에서 그리고 송파에서 연달아 가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내려던 가족을 궁지로 몰아넣은 사연은 각기 다를 것이다. 다만 비극을 그리는 공통점은 있다.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 부모가 자신들의 손으로 먼저 자녀를 세상과 등지게 했다는 절망적인 마침표다. 사건 현장이 참혹하든 고요하든, 아이들은 크디큰 충격 속에서 사그라졌을 것이다. 갖가지 고통에 헤매다 종국엔 내게 손을 뻗는 부모의 눈빛을 그대로 받아내면서 말이다. 고작 17개월 전 엄마가 된 나로선 최근의 일들이 가슴에 그대로 내다 꽂힌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시절, 감염자인 채로 음압병동에서 어렵게 출산을 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아기 얼굴을 봤다. 부모 품에 한번 안겨 보지도 못한 채 그 시간을 보냈을 아이를 생각하며 애달팠지만, 긴 걱정이 겸연쩍게도 아이는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깽깽 울었다. 젖냄새를 맡자마자 울음을 뚝 그치던 아이의 또랑또랑한 눈을 보고선 어쩐지 안심이 됐다. 내 걱정이 어떤 크기인들, 삶을 향한 아이의 의지는 늘 그 자체로 빛나리란 생각이 들어서다. '사업에 실패해, 빚에 시달려, 범죄에 연루돼···.' 일련의 일가족 사망 사건에서 확인된 원인은 대체로 '어른들의 서사'로 꽉 차 있다. 그들의 삶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냐마는, 부모가 없이 홀로 남겨질 자녀의 무게를 어찌 가늠하겠냐마는, 살아서 빛날 아이 미래의 가치 역시 그 누구도 감히 깎아내릴 수 없지 않은가. '동반 자살'이라는 오래된 정의 안에서 '자녀 살해'의 관점이 강조돼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가족의 공동체적 삶을 중시하는 한국에서 유독 이러한 사건이 빈번한데, 이미 미국과 유럽에선 '자녀 살해 후 극단적 선택'을 극심한 아동학대의 범주로 이해하고 있다. 국내의 많은 사회학자, 심리학자 역시 "자녀 살해는 부모가 겪는 실패의 경험과 감정을 자녀에게까지 일방적으로 덧씌우는 것에 불과하다"며, 이 사안을 무겁게 다룰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모성과 부성이란 게 얼마나 진한데 오죽했으면···'이란 관습적 이해를 끝으로 사건을 흘려보내선 안 된다는 얘기다. 이 커다란 비극을 그 가족의 일로만 묻어둘 수는 없는 이유도 있다. 대다수의 사건에서 이들 가족은 밀린 가스요금과 수도요금, 채무와 빚 독촉, 아이의 학교 결석 등으로 사회에 여러 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 가구를 발굴하는 시스템이 좀 더 기민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사건마다 '심리부검'에 준하는 철저한 규명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는 진단은 그래서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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