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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파릇

어제 보던 나뭇가지인데, 오늘은 파르스름하니 달라 보인다.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새로 난 여린 잎이 가지를 채워 가고 있다. 이파리가 투명할 정도로 맑다. 한 해 중 가장 고운 연둣빛으로 경쟁이라도 하듯 얼굴을 내미는 나뭇잎들, 4월을 '잎새달'이라고 이름한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파르스름한 빛은 처음에는 있는 둥 마는 둥 옅은 빛을 띠다가 며칠 사이에 곧 짙은 색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감동을 담아 하는, 흔한 봄 인사가 있다. '신록의 계절에…'로 시작하는 말이다. 봄날 행사의 공식적인 인사말로, 또 신학기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신문의 첫 구절로 거의 판박이다. '신록'은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인데, 새잎만 보면 신록이란 말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명한 수필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신록 예찬'은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난 글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평생 쓰는 말은 자신이 배우고 겪은 범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본 것, 느낀 것을 진정성 있게 표현하려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말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모양과 상태를 그려내는 우리말은 소중한 언어자원이다. 그런데 말은 마치 숨을 이어가는 생명체와 같다.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주 불러주지 않으면 책장 위 서류처럼 소복이 쌓인 먼지에 묻혀 버릴 수 있다. 다시 한번 나무를 올려다본다. '파릇한 잎'이 보인다. 발 앞에는 '파릇한 풀포기'가 있고, 저기 어느 들판에는 '파릇한 봄나물'이 나 있을 것이다. 조금씩 고개를 드는 파르스름한 이런 모양을 영어로는 'green here and there'처럼 구절로 묘사하는데, 우리말에서는 '파릇파릇하다'는 말 한마디면 정리된다. 상태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상당히 체계적이다. 파릇파릇은 '거뭇거뭇', '노릇노릇', '불긋불긋', '희끗희끗' 등 일정한 틀을 가진 한 무리로 당당하게 존재한다. 색은 아니지만 보드랍고 연한 모양을 말하는 '나긋나긋, 노긋노긋', 얇은 천이 나부끼는 '나붓나붓'과도 가까워 보인다. 봄은 들판에서 봄나물로 돋아난다고 한다. 파릇파릇한 산나물이 향긋한 뒷맛으로 입맛을 돋우는 것처럼, 파릇파릇이 난 새싹은 삶에 대한 의지와 용기를 돋우지 않는가? 오늘을 여러 번 지내고 이 파릇파릇한 새잎이 '푸릇푸릇'해질 때쯤이면, 여름이 봄의 손목을 잡고서 우리를 만나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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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UFO가 나타났다!

2025년 2월 1일 오후 2시, 남산타워 상공에서 번쩍이는 빛과 함께 UFO가 나타났다. UFO는 대리석으로 만든, 매끄럽고 흠집 없는 거대한 찐빵처럼 생겼다. UFO는 둥둥 떠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방 익숙해졌다. 하긴 생각해보면,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어진 북한의 전쟁 위협에도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UFO라고 익숙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자 UFO에서 갑자기 전파를 전송하기 시작했다. 이 신호는 유니코드로 디코딩할 수 있었다. UFO에 메시지를 보내면, UFO가 답을 하기도 했다! UFO는 수십 수백만의 메시지에 모두 답변을 해 주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지구를 연구하기 위해 온 연구선이라고 밝혔다. 그것의 메시지는 옛 오라클의 신탁과 비슷했다. 그것은 모호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순식간에 UFO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만들어졌고, 전 세계의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때 서울시 중구에 살고 있는 S씨가 있었다. S씨는 다들 열심히 사는 20대를 술독에 빠진 채로 보낸 사람이었다. 그는 UFO가 오후 두 시에 자기 집으로 찔끔 들어오던 햇빛을 가려서 몹시 화가 나 있었다(물론 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그런데 UFO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는 걸 듣고, S씨는 그것이 자기 일생의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그는 몇 년 전 세계를 휩쓴 암호화폐 열풍 때 그나마 모아둔 알량한 자산을 깨끗이 날려버린 적이 있었다. 그때 S씨는 그 열풍에서 돈을 누가 버는지 관찰했다. 순전히 트레이딩으로 돈을 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진짜로 돈을 버는 이는 바로 리딩방을 만들고, 코인 트레이딩하는 법으로 책을 쓴 사람들이었다! S씨는 인생을 아낌없이 낭비하고 있는 친구들을 모았다. 유유상종인 법이고, S씨나 그 친구들이나 이력은 쑥대밭이었다. 이걸 어찌저찌 끼워맞추면 UFO랑 무언가 관련 있어 보이게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천문학과 출신이었던 L씨는 졸업논문 주제로 외계 행성을 썼는데, 이걸 외계인 관련 논문 작성 경력이 있다고 말하는 식이었다. 완전히 조작도 아니지만, 완전히 진실도 아닌 경력을 가지고 S씨 일당은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 돈을 받고 UFO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해석하고, 이를 수익화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글을 올렸다. 그러니까 그냥 수백 페이지짜리 책을 판다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그 페이지를 UFO의 모호한 메시지로 가득 채웠다. 다가올 UFO 시대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온갖 사람들이 펀딩 버튼을 눌렀다. S씨는 10억 원이 넘는 자금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 책을 산 사람들 중 거기 담긴 정보로 UFO 메시지를 정말 수익화한 사람은 없었지만(다 읽은 사람도 드물었다), 어쨌든 S씨는 그 책을 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떠오르는 UFO 산업의 명사가 되었다. 그는 여기저기 강연을 나가면서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고, 곧 UFO가 햇빛을 가리던 집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물론 꽤 많은 사람들이 S씨를 비난했다. 어떤 작가는 칼럼에 대놓고 그걸 비아냥대면서 투덜대기도 했다. 하지만 S씨는 아무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 작가는 몇 원을 벌었는데? 기회는 오직 노력하는 이만 잡을 수 있다는 것을 S씨는 잘 알았다. ※이 UFO를 현대의 챗GPT로 치환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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