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에서 온 딸 증후군

입력
2022.04.18 00:00
26면

편집자주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 그러나 연명의료기술의 발달은 죽음 앞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가망 없는 연명의료 중단하려 했지만
10년 만에 나타난 아들 반대로 무산
40일 후 결국 사망... 과연 효도일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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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초반의 남성 환자가 심한 호흡곤란과 객혈로 응급실에 도착하였다. 환자는 10년 전에 결핵을 진단받고 치료를 시작했으나, 완치가 되지 않고 치료와 재발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결핵약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다제내성결핵으로 진행되었고, 폐가 손상돼 혈관이 노출되면서 심한 출혈이 발생한 것이었다.

기침할 때마다 많은 양의 피가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 피가 기도를 막아 생명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여러 지혈제를 투약하였으나 객혈은 멈추지 않았다. 출혈중인 폐의 혈관 위치를 조영술로 확인하고, 그 혈관을 막는 시술을 한 후에야 겨우 환자는 안정을 찾았다.

객혈은 멈추었지만,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는 이미 40대 후반부터 앓고 있던 당뇨병 합병증으로 콩팥 기능이 저하되어 만성신부전 상태였는데, 이제 아예 스스로 소변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요독증 소견을 보여 응급 혈액투석을 시작했으나, 콩팥이 완전히 망가져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매번 5~6시간이 소요되는 혈액투석을 주 3회 이상 시행해야 했다.

담당 의사가 장기적 혈액투석에 필요한 혈관을 확보하기 위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하니까, 환자의 아내는 긴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미 손상된 폐로 인해 자력으로 호흡조차 어렵게 된 남편이 회복할 가능성이 없다면, 혈액투석을 중단하고 거주지 근처의 작은 병원으로 옮기고 싶다고. 보호자의 이 말은 환자의 연명의료 중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회복할 가능성은 없으나 혈액투석을 중단하면 생명 유지가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의료진은 병원윤리위원회에 자문을 요청하였고,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해서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권고를 받았다. 환자는 완전히 의식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의사소통될 정도로 의식이 명료해지지는 않았다. 환자의 의사를 직접 확인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의료진은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대리 결정을 하기 위해, 가족관계증명서 제출을 요청했다.

현재 병간호 중인 보호자는 10여 년 전 재혼한 부인이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통해 확인된 전처 소생의 아들은 이혼 후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연명의료결정에 필요한 서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직계가족 전원의 동의가 필요했다. 아들의 연락처를 힘겹게 알아내 환자 상황을 알렸다.

부모 이혼 후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연명의료 중단에 필요한 서류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오히려 의료진에게 자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모든 의료를 끝까지 해 달라고 요구했다. 긴 세월 동안 여러 질병을 앓고 있는 남편의 병 구완을 혼자서 도맡아 해 온 아내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가족 간 의견 불일치로 연명의료 중단은 결국 이뤄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일하다 보면 평소에는 환자와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가족이 갑자기 나타나 의료진을 붙잡고 "꼭 살려달라, 할 수 있는 것은 끝까지 다해달라"고 하는 상황을 자주 본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인 것만은 아닌지, 미국에도 '캘리포니아에서 온 딸 증후군(Daughter from California Syndrome)'이라는 표현이 있다. 본인으로서는 너무나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환자에 대한 자신의 죄책감이 더해져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본다.

본인의 의사 확인이 어려울 때, 연명의료 중단결정은 배우자와 1촌 이내 직계가족 전원의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환자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와 혈액투석기에 의존한 채 40일간을 더 연명하다가 결국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아들은 마지막 효도를 했다고 해야 할까.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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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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