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계획 거부한 이슬람 결혼 이주여성

입력
2022.06.13 00:00
26면

편집자주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 그러나 연명의료기술의 발달은 죽음 앞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치료중단' 빌미로 오해, 한때 작성 거부
연명의료 이후, 고향서 '삶 마감' 기회
연명의료 부정 시각도 되돌아봐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남편에게 물어보세요. 남편이 결정해야 해요." 악성림프종이 악화하여 위중한 상태가 된 30대 초반의 여성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 환자는 이런 말을 반복했다. '연명의료계획서'란 말기환자의 의사를 존중하여 담당의사가 환자에 대한 심폐소생술, 혈액 투석, 인공호흡기와 같은 연명의료의 결정에 관한 사항을 계획하여 작성하는 서류를 말한다.

환자가 우즈베키스탄에서 결혼이민을 온 여성이었기에 통역까지 동원하여 연명의료계획서에 관해 설명하고, 환자가 의식이 있는 상황에서는 환자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남편과 상의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거부했다. 남성 중심 문화인 이슬람 교도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비용 때문에 병원이 치료를 중단하려 한다고 오해를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편과 연락하려고 시도했으나 환자가 알려준 남편의 전화는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환자는 2년 전 보건소 가슴 X선 사진에서 종격동 종양이 발견되어 조직검사 후 악성림프종으로 확진되었고, 이후 규칙적으로 항암제 치료를 받아왔다. 그동안 병원에 남편이 같이 오기도 했었는데, 이번에 입원한 이후로는 남편이 온 적이 없었다. 환자와 시댁 식구 사이에는 왕래가 없었다. 경찰을 통해 남편을 찾아보니 간암으로 인한 간성혼수가 발생하여 의식이 없는 상태로 다른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상담을 통해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환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도우며 살다가 20세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50대 한국 남성과 결혼하여 한국에 왔다. 언니들도 고향을 떠나 러시아에 있으며 본인이 아프다는 것을 가족에게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자녀 없이 5년째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결혼 후 지속적인 가정폭력이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입원해 있던 병동에서도 남편이 환자를 때리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한국에 온 이후 그녀의 삶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감지한 환자는 "할 수 있는 치료까지 받고 본국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의논할 가족과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담당 의료진은 연명의료에 대해 윤리위원회에 자문했다. 윤리위원회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생명만 연장하는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사용은 권고하지 않았다. 그러나, 환자가 본국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필요한 혈액투석과 같은 연명의료행위를 지속하는 것은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중환자실에서 혈액투석과 산소공급을 받은 환자는 다행히 의식을 회복하였으나, 그 사이에 간암으로 다른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뒤늦게 동생의 상태를 알게 된 언니가 한국으로 오기 위해 비자 발급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의료진은 언니가 도착하기 전까지 환자가 생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이 모든 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한 환자는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에 협조하였다. 수일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병실로 이동이 가능한 수준으로 회복된 환자는 때맞춰 한국에 도착한 언니와 함께 고국의 어머니에게 돌아가겠다고 퇴원했다.

연명의료에 무조건 집착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연명의료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이 환자의 경우 연명의료가 환자의 병을 고치지는 못했지만, 고국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 타국에서 받은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하고 삶을 마무리할 시간을 주었다면 분명히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대체텍스트
허대석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