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개인주의자들의 추석

입력
2022.09.13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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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차례상은 "가족끼리 정하는 대로 차려도 좋다"는 것이 성균관의 공식 입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차례상은 "가족끼리 정하는 대로 차려도 좋다"는 것이 성균관의 공식 입장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설과 추석 다음날만 되면 끙끙 앓는 주부들로 약국이 문전성시였어요. 뭔가 잘못됐다 싶었죠.” 몇 해 전 ‘행복한 전향’을 한 어르신들을 취재할 때였다. 자식들보다 먼저 “거창한 차례상은 이제 그만!”을 외친 집안 어른들을 찾아다녔다. 약사로 일하던 한 60대 어르신은 당시 3년째 남다른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형·동생과 미리 성묘를 마쳤고, 추석에는 사온 떡과 과일 한 접시에 차 한 잔을 올린 작은 상을 차려 아내와 고향 방향으로 절을 하는 것으로 예를 갖췄다. 일가친지가 집합하는 일은 없다.

취재의 대상까지 된 일이 되레 신기하다는 듯 어르신은 답했다. “며칠씩 걸려 장을 보고 차례상을 차리고 치우고, 모인 가족들 식사까지 챙기는 게 얼마나 고돼요. 내가 하기 힘든 건 타인에게도 맡기지 않는 게 당연하죠. 큰 결단이라기보단, 세월이 흐르며 합리성을 찾다 보니 물 흐르듯 변했어요.” 가족 간의 정이야 무슨 걱정이냐는 반응이었다. “사이가 좋으면 평소 서로 잘하잖아요. 명절 하루 못 본다고 정 걱정할 가족은 모여도 큰소리만 날 뿐이죠.”

직접 변한 어른들을 취재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공통된 항변 때문이었다. 수년째 ‘차례상은 간소하게’를 주제로 여러 기사를 쓸 때마다 독자들은 '무력하다'며 가슴을 쳤다. “언론만 이러면 뭘 하나요. 어른들이 바꿀 생각이 없는데요!” “아니, 이거 우리 어른들 보시게 9시 뉴스에 종일 좀 내보내주세요.” 하지만 막상 놀랐던 건 취재가 시작된 후였다. 전국 곳곳에는 ‘추석의 미래’가 당도해있었기 때문이다.

‘차례상 지킴이’인 줄로만 알았던 어르신들한테서 합목적성, 합리성, 합법성 같은 단어가 나왔다. 큰 차례상은 효와 예를 다하겠다는 당초 목적에 정말 걸맞나. 주로 여성에게 노동을 전가하는 게 효의 달성을 위한 최적의 수단인가. 전국 친지를 불러 모아 앉혀 서로 선 넘는 질문을 건네는 명절 문화가 각 개인에게 존엄을 부여하는 인간 사회의 규범에 부합하나. 명절 문화의 진정성은 이미 전국 어르신들에게조차 모든 면에서 의심받고 있었다. 한참 늦은 감이 있지만 올해 성균관은 간소한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하며 이 의심에 무게를 더했다. 자진했든 떠밀렸든 모두는 기어코 앞으로 한 발짝을 내디디는 중이다.

일일 드라마 속 삼대가족이 더 이상 표준이나 모두의 이상향이 아니듯 추석의 클리셰도 변하고 있다. 전통적 귀향을 누리기도 하지만, 저마다의 작고 귀한 방법으로 누군가를 기리기도 한다. 구슬땀을 흘리며 겨울을 예비하는 이도 많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고된 일상에 쉼표를 찍으며 서로를 떠올리고 안부를 묻는다. 부지런하고 다정한 개인주의자들의 시간, 내 표준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 미덕, 추석의 뉴노멀(New Normalㆍ새 표준)이다.

냉담하게 즐기거나, 뜨겁게 혹사당하는 전체주의자로 사는 편보다는 추석의 본래 의미를 찾기에도 제격이다. 일 년을 매듭짓고, 감사하며, 재회하고, 화해하며, 겨울을 예비하는데 꼭 잔치가 필요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성균관의 발표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이든 가족들이 합의해 결정하기 나름”이라는 걸 강조한 대목이다. 이를 새긴 이들의 추석은 유독 다정했을 것이다. 해가 갈수록 따뜻하고 애틋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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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영 커넥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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