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는 의외의 용기, 등산

입력
2022.10.16 04:30
15면

<18> 내가 K등산을 한 이유

편집자주

강소희 작가, 서효인 시인이 스포츠로 풀어내는 세상 이야기. 스포츠에 열광하는 두 필자의 시점에서 이 시대의 스포츠를 응원하고 지적합니다.

등산객들이 단풍이 들기 시작한 북한산 백운대 정상 부근에서 하산하고 있다. 9월 26일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뒤의 풍경이다. 왕태석 선임기자

등산객들이 단풍이 들기 시작한 북한산 백운대 정상 부근에서 하산하고 있다. 9월 26일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제된 뒤의 풍경이다. 왕태석 선임기자

하늘은 높고 바람은 차고 나는 모든 게 지겹다. 가을마다 밟고야 마는 은행 같은 계절성 우울증인지, 들불처럼 퍼져나가는 번아웃인지, 평범한 사람의 들숨 날숨 같은 투정인지. 하여간 모든 게 지겹다. 타인의 배가 내 등에 퍼즐처럼 들어맞는 출근길 지하철도 지겹고 회사의 주인처럼 일하는 것도 지겹고 회사의 노예처럼 일하는 것도 지겹다. 오후 네 시부터 ‘오늘 저녁 뭐 먹지’ 고민하는 것도, 말과 말 사이에 적당한 농담을 던져야 하는 것도, 겨울이 오는 것도 지겹다. 그중 제일 지겨운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지겨워하는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 데나 누워버리고 싶다. 그대로 눌어붙어 누룽지나 되고 싶다. 그런 내가 등산을 갔다. 과연 누룽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등산 약속은 어느 날 오후에 뜬금없이 태어났다. 회사 사람들과 등산이라니. 가을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다. 갓 입사한 사람이라면 얼굴이 파랗게 질려버릴 일이다. 주최자는 어떤 외부적 압력도 없는, 자발적 의지로 참여하는 아주 순수한 가을 산행이라고 강조했지만 결국 두 명의 신입 사원이 합류함으로써 그의 주장은 다소 힘을 잃게 됐다. 그날 나는 왜 ‘저도 가겠습니다’라는 단체 회신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고였다. 의자 위에 간신히 몸을 놓아두고 있을 뿐 심정적으로 이미 고소함을 잃어버린 누룽지로서 스스로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발 작용이 아니고서야 도대체 왜 내가.

날짜가 다가올수록 오른쪽 무릎이 시원찮은 신호를 보내오는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같은 동네에 사는 동료를 태우고 가겠다는 섣부른 약속만 하지 않았어도 당일 아침 ‘제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요. ㅜㅜ 다음에 꼭 함께해요!’라는 문자를 보낸 뒤 고양이를 끌어안고 다시 잠들 수 있었을 텐데. 깜냥도 안 되는 주제에 좋은 동료인 척하고 싶어 했던 과거의 자신을 몹시도 규탄하며 나는 절망적인 토요일 아침을 맞았다.

등산객들이 백운대 정상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등산객들이 백운대 정상을 향해 줄지어 올라가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오전 10시 북한산 백운대 등산 지원 센터 앞. 일단 커피부터 마셔야 했다. 회사고 자연이고 카페인 섭취가 우선이다. 카페에 들어섰을 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카페인을 함유한 갈색 음료를 얻게 되리라는 것을. 제대로 된 커피를 기대할 수 없을 땐 아메리카노가 최선임을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라테를 주문한 나는 카페인과 우유를 함유한 연갈색 음료를 얻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어중간한 맛 콘테스트가 있다면 최소 5연패는 가능할 것 같은 커피를 앞에 두고 동료들을 기다렸다.

마침내, 오랜 시간 그곳에 서서 나를 기다렸을 희고 푸른 산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을 때, 나는 돌아와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는 기분을… 느꼈을 리가. 그저 미끄러지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한 발 한 발 꼭꼭 돌을 밟으며 걷느라 땀을 뻘뻘 흘릴 뿐이었다. 우리 일행은 산에 오르기 전에 이야기한 바가 있다. 오르다가 힘들면 언제든 내려와도 된다고. 무리하지 말자고. 5분쯤 올랐을까, 나는 이미 내려가고 싶었다. 일상화로 둘레길인지 산인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산들만 가끔 다녔을 뿐인 내게 북한산 백운대는 초반부터 지나치게 본격적이었다. 백운대가 사람이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그를 멀리했을 것이다. ‘거리 감각이 이상해! 다짜고짜 이게 무슨 짓이야!’ 소리치며 멀어졌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대신 쉬어가자고 했다. 누군가 말했다. 고작 10분이 지났다고.

등산객들이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등산객들이 북한산 백운대 정상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정말로 이 난이도로 계속 걸어야 한다면, 진짜로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마음을 먹으려던 찰나, 내리막길이 시작됐다. 순식간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어째서 실패를 내리막길로 비유하는 거지? 내리막길은 이렇게 신나고 시원하고 웃음이 나는데?’라고 생각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내리막길은 최고다. 내 인생이 그냥 내리막길 같으면 좋겠다. 내리막길 끝에는 평지도 있고 밥집도 있는 걸.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오려고 하는 걸 누군가 알아채 버린 걸까. 그는 단숨에 콧구멍을 찌르는 듯한 말을 던졌다. “이렇게 내려간다는 건 곧 올라간다는 걸 의미하죠.”

왜 인간은 산에 오를까. 수렵과 채집, 측정과 연구 목적이 아닌 등산이라는 행위는 어쩌다가 생겨나고 이름까지 얻었으며 이렇게까지 성행하게 된 것일까. 오르막길 위에서 나는 물음표 괴물이 돼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개미 같은 사람들이 암벽에 매달려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수봉이라는 곳이었다. 우리나라 등산 역사를 찾아보면 일찍부터 호명되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조난한 장소이다. 도대체 인간은 왜, 도대체 나는 왜.

산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난간과 로프가 자주 등장했다. 그리고 정체 구간이 잦아졌다. 나는 그 정체 구간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한숨 돌릴 수 있고, 잡담도 나눌 수 있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제법 멋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내려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며 한쪽으로 비켜 있느라 어쩌다 내가 올라가는 사람들의 선두에 선 모양새가 되었을 때 저 뒤에서 “거기 좀 올라가세요! 밀리잖아요!”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내려오는 분들이 계셔서요”라고 대답했지만 계속 올라가라고 메아리처럼 외쳐대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급기야 동행인을 데리고 사람들을 제치고 올라와서 우리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봤자 한 개뿐인 통로를 어찌할 수도 없을 텐데. 마치 자기가 앞으로 나서면 길이 두 개로 갈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문제의 메아리씨가 우리를 제치고 나가 한 일이라고는 내려오는 사람들과 언쟁을 벌인 게 전부다. 높은 하늘 아래에서, 푸른 산속에서, 하얀 바위 위에서, 고작 저딴 걸로 처싸우고 있다니. 그렇게 급하면 어제 출발하지 그랬슈~.

광주 무등산국립공원 지왕봉 앞에서 등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광주=뉴시스

광주 무등산국립공원 지왕봉 앞에서 등산객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광주=뉴시스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 산을 오르는 우리네 모습은 참으로 K적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행렬의 페이스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도. 정상 태극기 옆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30분 동안 기다리는 것도. 사진 잘 찍겠다고 자꾸 뒤로 가다간 떨어져 죽는다는 농담을 하는 것도. 주말 한강 지구에 버금가는 밀도에도 저마다 싸 온 과일과 김밥과 라면과 떡을 나누어 먹는 것도. 그러다가 방송사 헬기가 날아오는 걸 보고 다 같이 환히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도.

“고질적인 디스크에 시달려서 운동해야 하긴 하는데 필라테스는 안 맞고 헬스는 부담스러워서 매주 작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어요. 돈도 안 들고 무지 힘들고. 운동 효과가 너무 좋았어요. 올라가서 탁 트인 풍경을 보았을 때 마음이 치료되는 느낌도 받고요. 내려오면 식욕이 돌아서 먹는 음식마다 진짜 맛있는 거예요. 운동과 자연과 식욕. 이 삼박자가 좋아서 매주 높은 산, 낮은 산에 가는 게 루틴이 되었어요.” 우리를 산으로 이끈 오수경 씨가 전하는 등산의 맛이다. 기분 좋은 전도의 말씀인데 사실 내 마음을 건드린 말은 따로 있다. “특히 힘든 프로젝트를 맡고 있을 때, 초반에 진짜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있잖아요. 그럴 때 2~3시간짜리 등산하면 그게 진짜 프로젝트랑 비슷한 느낌이에요. 초반에는 죽을 것 같고, 못할 것 같고, 안 끝날 것 같고, 너무 지루하고. 근데 결국 끝나는 게 ‘할 수 있다’라는 용기가 되는 거예요.”

회사 다니느라 생긴 디스크 때문에 산을 오르면서도, 힘든 프로젝트와 겹쳐 보며 용기를 얻는다는 오수경씨의 말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얼굴로 그만 위로받고 말았다. 그날의 산을 떠올려 보면 누룽지 위에 뜨거운 물을 부은 것만 같다. 처음엔 정말 싫었지. 지루했지. 짜증 났지. 그저 눕고만 싶었지. 근데 결국엔 정상에 누웠지. 사과를 먹었지. 김밥도 먹었지. 그날 8시 뉴스에도 나왔지.

아무리 그래도, 등산 학교를 알아보고 있는 건 좀 오버 아닌지.

강소희 작가·카피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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