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과 송혜교는 왜 '학교'에서 복수할까

입력
2022.12.02 04:30
수정
2022.12.02 10:56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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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가 대신 학교·군대 배경으로 한 'K누아르'
홍콩 미국과 달리 공적 공간 집단 범죄로 세계관 확장
"현실적 비극 오싹"... 글로벌 OTT 잇단 투자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1'에서 고2 시은(박지훈·왼쪽)은 집단 괴롭힘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쓴다. 그의 무기는 볼펜. 넷플릭스 새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동은(송혜교)은 선생이 돼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 웨이브 제공, 넷플릭스 티저 영상 캡처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1'에서 고2 시은(박지훈·왼쪽)은 집단 괴롭힘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쓴다. 그의 무기는 볼펜. 넷플릭스 새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동은(송혜교)은 선생이 돼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 웨이브 제공, 넷플릭스 티저 영상 캡처

"벌을 안 받았잖아!" 의자에 팔과 다리가 꽁꽁 묶인 그는 얼굴을 숨긴 사내가 휘두른 망치에 일격을 당한다. 범죄 장소는 도시의 음산한 뒷골목이 아닌 고등학교 사진부 암실. 고등학생 수헌(로몬)은 학교에서 신분을 숨긴 채 피해자의 복수를 대신한다. 돈을 받고 성폭력이나 학교폭력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당당히 학교에 다니는 가해자들을 응징하는 것이다.

OTT 디즈니플러스가 최근 공개한 '3인칭 복수'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어둡고 묵직하게 쫓는다. 무기 밀매와 위조지폐의 암흑가 대신 10대 '교복 누아르'인 셈이다. '3인칭 복수'의 김유진 감독은 "지켜주는 이가 없는 아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었기 때문에 죽은 쌍둥이 오빠 대신 여동생이 그리고 수헌이 복수를 하는 것"이라며 "성장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시리즈 '3인칭 복수'는 고등학생판 '모범택시'다. 수헌(로몬)이 학교폭력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한다. 디즈니플러스 제공

시리즈 '3인칭 복수'는 고등학생판 '모범택시'다. 수헌(로몬)이 학교폭력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한다. 디즈니플러스 제공


성냥개비 꼬나문 '형님'은 없다

K콘텐츠가 누아르의 세계관을 확장하고 있다. 학교나 군대 등이 요즘 떠오르는 K누아르의 주 무대다. 시커먼 선글라스와 바바리코트를 입고 삐딱하게 깨문 성냥으로 불을 붙여 담배를 피우는 '형님'은 없다. 그간 누아르물의 인기를 주도했던 홍콩과 미국이 뒷골목 조직의 범죄에 치중했다면, K누아르는 공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집단의 범죄에 초점을 맞춘다. 시리즈 '약한영웅 클래스1'(웨이브)과 '소년비행' 시즌1~2(씨즌·2022) 그리고 '인간수업'(넷플릭스·2020)에선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범죄 조직 못지않은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거친 질감으로 보여주고, 'D.P.'(넷플릭스·2021)에선 군대에서 대물림된 집단 괴롭힘의 비극을 들춘다. 한국 위계사회의 두 축인 학교와 군대에 대한 응어리가 K누아르로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시리즈 '소년비행'은 10대의 마약범죄를 다룬 누아르 작품이다. 씨즌 제공

시리즈 '소년비행'은 10대의 마약범죄를 다룬 누아르 작품이다. 씨즌 제공

누아르 변주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올 연말 국내 화제작으로 떠오른 '약한영웅'은 미국을 거점으로 한 라쿠텐 비키 등 해외 OTT에서 10점 만점에 9점 후반대의 높은 평점으로 해외에서 입소문을 탔고, 'D.P.'는 우리와 같은 징병제를 시행하는 베트남과 태국 넷플릭스에서 1위를 차지며 '오징어 게임'과 더불어 시즌2(2023년 공개)가 기대되는 K콘텐츠로 손꼽힌다.

2023년 시즌2 공개를 앞둔 'D.P.'. 군인 안준호(정해인)가 내무반에서 얼차려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군대에서 벌어지는 집단 폭력을 누아르처럼 쫓는다. 넷플릭스 제공

2023년 시즌2 공개를 앞둔 'D.P.'. 군인 안준호(정해인)가 내무반에서 얼차려를 받고 있다. 이 작품은 군대에서 벌어지는 집단 폭력을 누아르처럼 쫓는다. 넷플릭스 제공


교사, 학생, 군인이 복수하는 이유

교복과 군복을 '입은' K누아르의 인기 비결은 크게 두 가지. ①그들만의 비극으로 느껴지는 범죄조직 누아르와 달리 시스템이 무너진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토대로 해 공감을 이끌고 ②사회적 설움이 응축돼 터져 나온 몸부림(액션)이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는 게 콘텐츠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악한영웅'에서 청소년을 향한 또래 및 사회적 폭력에 학교와 경찰은 속수무책이다. 공희정 드라마 평론가는 "'약한영웅'은 청소년 범죄를 통해 어른의 부재를 통렬히 보여준다"며 "학교와 군대를 배경으로 한 K누아르는 폭력이란 것이 폭력을 막기 위한 자기만의 생존방식으로 쓰여 더 비극적 메시지를 던진다"고 분석했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문제를 사적 영역에서 위법으로 해결했던 드라마 '모범택시'(2021)도 변주된 K누아르의 새 유형"이라며 "공적 조직을 유지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폭력적 상황을 용인 또는 묵인했던 것을 청산하려는 사회적 열망이 학교 혹은 군대를 배경으로 한 K누아르의 인기 배경"이라고 진단했다. 해외 시청자들이 '약한영웅' 등 K누아르에 주목한 이유도 바로 "현실성"이었다.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 비극이 벌어지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닫고, 그래서 오싹하며 감정의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amyn***)는 반응이다.

시리즈 '카지노'는 필리핀 카지노계 거물인 무식(최민식·왼쪽)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누아르 작품이다. 형사 승훈(손석구)은 무식을 추적한다. 디즈니플러스 제공

시리즈 '카지노'는 필리핀 카지노계 거물인 무식(최민식·왼쪽)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누아르 작품이다. 형사 승훈(손석구)은 무식을 추적한다. 디즈니플러스 제공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동은(송혜교)이 선생이 돼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누아르 작품이다. 넷플릭스 제공

시리즈 '더 글로리'는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동은(송혜교)이 선생이 돼 가해자들에게 복수하는 누아르 작품이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디즈니플러스 등 잇단 투자

소재를 넓힌 K누아르가 국내외 시청자를 사로잡으면서 해외 자본도 몰리고 있다. 넷플릭스는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당해 자퇴한 동은(송혜교)이 교사가 돼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를 그린 '더 글로리'(30일 공개)에 투자했다. 디즈니플러스는 필리핀 카지노계의 큰손인 차무식(최민식)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카지노'(21일 공개)와 국제 범죄 조직을 잡기 위해 그 조직에 잠입한 형사 이야기를 다룬 '최악의 악'(공개일 미정)을 잇따라 선보인다. 영화 '범죄도시'를 연출해 유명한 강윤성 감독이 '카지노'를 제작할 때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사실감"이다. 그는 필리핀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는 사람을 직접 만난 뒤 대본을 썼다. 1일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에서 열린 '디즈니 콘텐츠 쇼케이스 2022'에서 국내 취재진과 만난 강 감독은 "시청자가 봤을 때 '저런 세상이 있을 것 같다'고 믿게끔 진짜 같은 누아르물을 만들고 싶어 사실감을 중시하면서 촬영했다"며 "그런 현실감이 홍콩과 미국 등 다른 나라 누아르물과의 차별점"이라고 말했다.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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