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지만 불에 잘 타는 '가성비' 아크릴, 방음터널 화재 불쏘시개 됐다

입력
2022.12.30 04:30
수정
2022.12.30 13:41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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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0m 방음터널, 순식간 화염 휩싸여
재질 PMMA 가볍고 시공 간편하지만
화재 속수무책... PC보다 인화점 낮아
이미 화재 취약성 입증, 개선은 안 돼
"안전한 강화유리 사용 법제화 필요"

29일 오후 경기도 과천 갈현동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방음터널에서 발생한 화재로 화염이 치솟고 있다. 뉴스1

29일 오후 경기도 과천 갈현동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방음터널에서 발생한 화재로 화염이 치솟고 있다. 뉴스1

“갑자기 폭죽 소리처럼 ‘펑펑’ 소리가 나더니 검은색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였어요.”

29일 오후 1시 50분 경기 과천시 제2경인고속도로 갈현고가교 방음터널을 지나던 운전자 김선미(41)씨는 사고 당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폐기물 집게차 트럭에서 난 불이 삽시간에 터널 외벽으로 옮겨붙으며 내부는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830m에 달하는 왕복 8차선 구간이 모두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고, 뜨거운 열기로 터널 천장이 녹아 ‘불똥’이 비처럼 떨어졌다.

8세 아들과 터널 밖으로 탈출한 김씨는 “우리는 뒤쪽에 있어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터널을 통과하던 윤모(60)씨도 “차들이 갑자기 서행하더니 ‘뻥’ 소리와 함께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면서 “수건에 물을 적신 다음 차에서 내려 직장 동료와 100m 정도를 전력질주했다”고 말했다.

대규모 인명피해를 낸 가장 큰 원인은 빠른 화재 확산 속도에 있다. 전문가들은 해당 방음터널 벽과 천장에 설치된 구조물 재질인 폴리메틸 메타크릴레이트(PMMA)가 ‘불쏘시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PMMA는 '아크릴 소재’로 불린다. 강화유리에 비해 햇빛 투과율이 높은 데다, 충격에 강하고 시공도 간편해 ‘폴리카보네이트(PC)’와 함께 방음벽 소재로 널리 활용된다고 한다.

문제는 화재에 속수무책이라는 점이다. 이용재 경민대 소방안전관리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PMMA는 불에 잘 타 화재에 굉장히 취약하다”고 설명했다. 서울시립대 재난과학과 박사과정 학생 김태우씨가 발표한 ‘방음터널의 화재안전성에 관한 국내 연구 동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PC 소재 방음판 시료를 이용해 난연ㆍ준불연ㆍ불연 등급을 매기는 ‘콘칼로리미터’ 시험을 해보니 PC의 총방출열량이 목재보다 높았다. 심지어 PMMA는 인화점이 약 160도로 PC(약 250도)보다도 낮았다.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차량(방음터널) 화재. 그래픽=강준구 기자

과천 제2경인고속도로 차량(방음터널) 화재. 그래픽=강준구 기자

PMMA가 불에 탈 때 내뿜는 다량의 유독가스도 피해를 키우는 요인이다. 공하성 우석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플라스틱 소재는 유독가스 발생량이 나무의 수백 배에 달해 연기 흡입 속도가 더 빠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용재 교수도 “터널 내 유독가스가 외부로 배출되기 어려운 점도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앞서 2020년 8월 수원 영통구 하동IC 고가도로 방음터널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도 터널 방음벽 50m 구간이 30여 분 만에 모두 불에 탔다. 당시는 새벽 시간이라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플라스틱 방음터널의 화재 취약성이 이미 입증된 것이다. 한국도로공사도 2012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방음 자재로 플라스틱 사용 시 “비상 상황에서 화재 원료가 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방음터널 소재를 ‘강화유리’로 의무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손원배 초당대 소방행정학과 교수는 “그나마 화재 안전성이 확보된 방음터널 소재가 강화유리인데 무게가 있다 보니 시공에 어려움이 있어 가벼운 PC나 PMMA 등 플라스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업체들이 비용 감축과 공기 단축 등을 이유로 플라스틱 소재를 쓰고 있으나, 화재 취약성이 충분히 검증된 만큼 강화유리 사용을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박준석 기자
김소희 기자
나주예 기자
강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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