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못·폭포·바위 어우러진 계곡 따라…33폭의 산수화 속으로

탄·담·대·폭·소… 덕유산 골짜기 서늘하게 적시는 33폭 산수화

입력
2023.08.09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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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무주 설천면 구천동어사길

구천동 33경 중 비파담 부근 풍경. 구천동관광특구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구천동어사길은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완만한 탐방로다.

구천동은 없다.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서 북측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흔히들 무주 구천동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식 행정 지명은 삼공리다. 10여 년 전 도로명 주소 표기로 ‘구천동로’가 생기기 전까지 공식적으로 구천동은 없었다. 조선 전기 문신 임훈(1500~1584)이 지은 기행문 ‘덕유산 향적봉기’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은 구천둔이었다. ‘둔(屯)’은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모인 곳을 의미한다. 계곡 상류 백련사를 중심으로 9,000명의 승려나 병사가 주둔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만한 인원의 먹거리를 대자니 계곡에는 항상 눈처럼 뽀얀 쌀뜨물이 흘렀다. 일대를 아우르는 지명은 설천면이다. 구씨와 천씨가 많이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다.

통문 하나로 연결된 신라와 백제, 나제통문

한 가지는 분명하다. 구천동 계곡이 전국적 관광지로 알려진 건 비교적 최근인 1960년대 초반이었다. 무주가 고향인 김남관이라는 인물이 당시 교통부에서 주관한 10대 관광지로 지정받기 위해 향적봉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비경을 찾아 ‘구천동 33경’의 이름을 붙이면서부터다. 더러는 옛 명칭을 살리고 일부 없던 이름을 새로 붙였다. 맑은 여울(灘)이 흐르며 형성된 푸른 연못(潭), 시원한 물웅덩이(沼), 풍광 좋은 전망대(臺)와 바위(岩), 그사이로 청량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瀑)가 계곡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다. 여름철이면 우거진 수풀과 청량한 물소리가 삼복더위를 잊게 해주고, 가을이면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 겨울 설경까지 아름다워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구천동 계곡 초입에 '구천동 33경'의 이름을 지은 김남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구천동 어사길 수풀 중간에 김남관씨가 세운 불상이 놓여 있다. 9,000기를 세울 예정이었지만 20여 기로 그쳤다.

33경의 시작은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맞댄 곳으로, 지금의 무주군 설천면 신두마을과 이남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석모산에 위치한 바위굴이다. 동굴 양쪽에 위치한 두 마을은 1㎞ 정도 떨어져 있지만 지금도 언어와 풍속이 많이 다르다고 한다. 통문 동쪽 이남마을 주민들에겐 실제 경상도 억양이 많이 섞여 있다는 얘기다. 장날이면 어투만으로 설천과 무풍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고 한다. 무주는 삼국시대 무풍현과 주계현에서 한 글자씩 따온 지명이다. 무풍현은 당시 신라, 지금의 경북 김천 땅이었다.

나제통문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 의하면 설천과 무풍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던 고갯길을 일제강점기에 신작로를 내면서 뚫은 굴이라 한다. 높이 3m, 길이 10m의 동굴 양쪽 위에 ‘나제통문(羅濟通門)’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 신라와 백제의 경계 지역이다.


구천동 33경 중 제1경인 나제통문으로 차량이 지나고 있다.

통문 서쪽은 바로 개울이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면 험한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도로 양쪽에 주차장과 정자를 설치해 놓아 아련한 역사를 되새기며 호젓하게 쉬어가기 좋다.

이곳부터 계곡을 따라 약 16km 상류인 구천동관광특구까지 제2경에서 제14경이 이어진다. 2경 은구암(隱龜巖)은 구산마을 부근에 숨어 있는 거북 형상의 바위다.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즐겼다 해서 강선대라고도 부른다. 개울물 소리가 거문고 소리처럼 신비롭다는 3경 청금대(聽琴臺), 넓은 암반에 용처럼 물줄기가 굽이치는 4경 와룡담(臥龍潭), 학이 노송에 둥지를 틀고 살았다는 5경 학소대(鶴巢臺), 돛대 모양의 기암이 절경을 이루는 6경 일사대(一士臺)가 이어진다. 연이어 흐르던 물이 잠시 쉬어가는 7경 함벽소(涵碧沼), 반반한 반석에 비단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8경 가의암(可意巖), 깊고 푸른 물웅덩이에 비친 가을밤 달빛이 선경을 이룬다는 9경 추월담(秋月潭), 석양빛 여울에 낚시를 드리우는 기분이 일품이라는 10경 만조탄(晩釣灘)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고요한 소에서 급류가 소용돌이치며 다시 소를 형성한다는 11경 파회(巴洄), 신라 때 고승이 흐르는 물을 보고 깨우친 바 있다는 12경 수심대(水心臺), 구천동을 오가는 행인들이 몸과 마음을 씻는 13경 세심대(洗心臺), 병풍을 두른 암벽 아래 거울처럼 맑은 물이 담겼다는 14경 수경대(水鏡臺)를 지나면 구천동관광특구에 닿는다.

14경까지는 계곡과 나란한 도로에서 멀지 않지만, 모두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일부는 차를 세울 수 없는 도로변에 안내판만 덜렁 세워져 있고, 때로 마을 안길로 들어가야 하는데 표지판도 불친절하고 더러는 길이 막혀 있다. 다만 12경 수심대 주변에 넓은 주차장이 조성돼 있어 아기자기한 암벽 사이로 굽이치는 물줄기를 감상할 수 있다.

햇볕 한 줌 없는 그늘, 구천동어사길

흔히 구천동 계곡이라 부르는 구간은 구천동관광특구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를 일컫는다. 주차장부터 6.4km 이동하며 해발 고도가 600m에서 900m로 높아진다. 대체로 경사가 완만해 덕유산의 높이나 깊이에 비하면 한없이 순하고 아늑하다. 개울도 낙차가 크지 않아 웅장한 폭포 하나 없지만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때로는 우레 같고 때로는 잔잔한 선율처럼 숲속으로 여울진다. 말하자면 수 킬로미터에 이르는 계곡 전체가 하나의 장대한 폭포이고 잘 조율된 오케스트라다.

관광특구 상가를 지나면 본격적인 숲길로 들어선다. 넓은 시멘트 포장도로에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어둑어둑하다. 조금 걷다 보면 요란한 물소리가 정적을 깬다. 15경은 월하탄(月下灘)이다. 달빛이 비치면 장관을 이룬다는 여울이다. 갈라진 바위 사이로 여러 개의 물줄기가 쉼 없이 쏟아진다.

일단 구천동 계곡에 들어서면 백련사까지 짙은 그늘 속을 걷는다.


구천동 계곡 초입의 제15경 월하탄.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폭포를 이루고 있다.


구천동어사길 계곡 위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그늘진 계곡이 원시의 기운을 뿜는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구천동어사길 맞은편은 포장도로다. 관광특구에서 백련사까지 운행하는 교통약자용 셔틀버스가 다니는 길이다.

월하탄에서 조금만 오르면 포장도로와 숲속 오솔길로 갈라진다. 포장도로로는 하루 5회 백련사까지 전기버스가 운행한다. 교통약자의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 덕유산국립공원에서 운행하는 버스다. 약 25분 만에 아주 쉽게 이동할 수 있지만 중간에 타거나 내릴 수 없다. 계곡의 참맛을 느끼려면 당연히 걸어야 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포장도로 건너편으로 난 오솔길은 특별히 ‘구천동어사길’이라 부른다. 조선 후기 횡포를 부리는 관리를 벌한 어사 박문수가 방문했다는 이야기에서 착안한 길이다. 어사길은 아주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그늘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계곡물이 한여름의 열기와 만나 때로는 한낮에도 뿌연 안개가 계곡을 감싼다. 개울과 바짝 붙은 구간을 걸을 때는 서늘한 바람이 일어 더위를 식혀 준다. 상록수림과 활엽수림이 빼곡한 가운데 일부 바닥에는 조리대가 덮여 있다. 시시각각 풍경이 변해 심심하거나 지겹지 않다. 간간이 습지도 지나는데 그런 곳엔 어김없이 목재 덱과 야자매트가 깔려 있어 불편하지 않다. 숨이 찰 정도로 가파른 계단이 없는 것도 이 길의 미덕이다.

구천동어사길은 걷는 내내 짙은 그늘 속에 청량한 물소리가 함께한다.


조선 후기 어사 박문수가 방문했다는 기록에서 '어사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천동 33경 인월담.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 아래 암반 위로 맑은 물이 쏟아지고 있다.


16경 인월담(印月潭) 위로는 철제다리가 계곡을 가로지른다. 어사길에서 드물게 하늘이 트이는 곳이다. 반석을 흘러내리는 폭포와 소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곳으로 신라 때 인월보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라 전해진다. 다시 녹음이 가득한 길을 거슬러오르면 사자 형상의 기암 사이로 물결이 흐르는 17경 사자담(獅子潭), 맑은 물이 암반으로 미끄러지는 18경 청류동(淸流洞), 연속되는 폭포 아래 깊고 푸른 물웅덩이가 형성된 19경 비파담(琵琶潭)이 연이어 나타난다. 아득한 옛날 구름을 타고 내려온 선녀들이 넓은 바위에 앉아 비파를 뜯으며 노닐던 곳이라는 비유를 담았다.

독특한 문양의 바위 위로 물살이 쏟아지고 있다. 구천동 계곡은 국가지질공원이기도 하다.


구천동 33경 중 비파담 부근 풍경. 구천동관광특구에서 백련사까지 이어지는 구천동어사길은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완만한 탐방로다.


구천동 33경 중 비파담 부근 물빛.

스님들이 비파담으로 미끄러지는 옥류로 차를 끓여 마셨다는 20경 다연대(茶煙臺), 월음령과 백련사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합류하는 21경 구월담(九月潭), 여울지는 물소리가 가야금 연주 같다는 22경 금포탄(琴浦灘), 산신령 심부름을 가다 호랑이가 낙상했다는 23경 호탄암(虎灘巖), 푸르스름한 물빛이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24경 청류계(淸流溪)를 지나 25경 안심대(安心臺)에 이르면 드디어 숲속 오솔길이 끝난다. 어둑한 숲길을 지났으니 이쯤이면 안심할 수 있다는 뜻일까.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관군에 쫓기다 한숨을 돌린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로 위 26경은 신양담(新陽潭)이다. 과장이 아니라 구천동 계곡에서 맑은 햇빛이 개울에 그대로 부서지는 거의 유일한 구간이다.

짧은 구간 볕을 쬐고 나면 다시 숲길로 접어든다. 이곳부터는 32경 백련사 경내로 접어든다. 거울같이 맑은 27경 명경담(明鏡潭), 층암을 타고 쏟아지는 28경 구천폭포(九千瀑布), 30경 연화폭(蓮華瀑)을 거친 맑은 물이 담긴 29경 백련담(白蓮潭)을 지나고, 속세와의 연을 끊고 사바세계로 접어든다는 31경 이속대(離俗臺)를 통과하면 가파른 경사에 층층이 자리 잡은 절간이 나타난다.

구천동 33경 향적봉 아래에 자리 잡은 32경 백련사. 신라시대 고찰이라는 역사에 비해 규모가 소박하다.


백련사 대웅전 담장 아래에 원추리가 곱게 피어 있다.


무주 구천동 여행 지도. 그래픽=김문중 선임기자


구천동 전설의 진원지나 마찬가진데 명성에 비하면 소박한 풍광이다. 대웅전 옆 넓은 마당에 풀이 무성하고, 낮은 담장 너머 산 능선이 웅장하기보다 푸근하다. 담장 아래에는 주황색 원추리가 산뜻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다. 푸른 하늘에 걸린 뭉게구름에 가을이 보인다. 백련사에서 구천동 33경인 향적봉(1,614m)까지는 약 2.5km, 본격적인 등산 코스다.

무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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