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과 중절을 꿈꾼다, '보통 사람'처럼

입력
2023.11.11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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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사오 '헌치백'

편집자주

시집 한 권을 읽고 단 한 문장이라도 가슴에 닿으면 '성공'이라고 합니다. 흔하지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그 기분 좋은 성공을 나누려 씁니다. '생각을 여는 글귀'에서는 문학 기자의 마음을 울린 글귀를 격주로 소개합니다.

헌치백·이치카와 사오 지음·양윤옥 옮김·허블 발행·140쪽·1만2,000원

헌치백·이치카와 사오 지음·양윤옥 옮김·허블 발행·140쪽·1만2,000원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 내 휘어진 몸속에서 태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할 텐데. 출산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물론 육아도 어렵다. 하지만 아마도 임신과 중절까지라면 보통 사람처럼 가능할 것이다. 생식기능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그래서 임신과 중절은 해보고 싶다."

일본 소설 '헌치백' 속 화자 '샤카'의 꿈입니다. 반도덕적 발언 같지만 사실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외침입니다. 중증 척추 장애로 샤카는 5평 남짓의 좁은 방에서 태블릿으로 글을 쓰며 매일을 삽니다. 평범한 연애도 섹스도 불가능하죠.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기 위해 파괴되고 살아낸 시간의 증거로서 파괴되어" 간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향해 가며 파괴되는 비장애인의 몸과는 정반대의 방향이죠.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삶이 "살아가기 위해 싹트는 생명을 죽이는 것", 임신 중절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자조합니다.

'헌치백'은 중증 장애인인 작가가 장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직격한 소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헌치백'은 중증 장애인인 작가가 장애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직격한 소설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소설은 샤카가 남성 간병인에게 자신이 임신하고 중절하는 걸 도와주면 1억 엔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며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서 비장애인으로서 인식조차 못했던 제 안의 오만과 무지를 마주했습니다. 성·재생산권뿐 아니라 종이책의 '특권'에 대해서도요.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하는 종이책 중심의 독서 문화가 얼마나 차별적인지 말이죠.

샤카에게 자신을 투영한 이치카와 사오 작가는 이 작품으로 지난 7월 일본 아쿠타가와상 역대 최초 중증 장애인 수상자가 됐습니다. 당사자 문학이 조금 더 주목받은 순간이기도 할 겁니다. 풍부한 당사자 문학은, 경계 너머 인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의 폭을 한 뼘 더 넓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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