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비례 2번 위성락, '미국통 전략가'는 이재명 '반일 프레임' 넘어설까[문지방]

입력
2024.03.24 14:00
수정
2024.03.2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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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외교와 통상의 결합이 왜 필요한지 대통령에게 설명해야 한다.”

‘2023 코라시아 포럼’에서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 왕태석 선임기자

‘2023 코라시아 포럼’에서 위성락 전 러시아 대사. 왕태석 선임기자

박근혜 정부 출범을 앞둔 2013년 초. 당시 외교통상부가 들끓었습니다. 통상 기능을 산자부로 이관하는 정부조직 개편 때문입니다. 하지만 서슬 퍼런 정권에 맞서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위성락 주러시아대사는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이메일을 동료 외교관들에게 보냅니다. 4강 대사 중에서는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요직에 있는 이들은 침묵하고 있을 때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낸 것이지요. 한 외교관은 "마치 격문 같았다. 막힌 속이 뻥 뚫렸다"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통상 기능을 끝내 빼앗겼고, 외교통상부는 외교부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 과정에서 위 대사는 존재감이 더 각인됐지만 이후 외교관으로서의 행보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가 10년이 지나 중앙정치 무대에 등장합니다. 더불어민주당의 위성정당 더불어민주연합이 그에게 남성 후보 가운데 가장 높은 순번인 2번을 준 것입니다. 당선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정부 관료 출신 중에 가장 높은 순번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아 '꼿꼿 장수'로 각인된 김장수 전 국방부 장관이 2008년 총선 당시 여야 모두에게 호평을 받아 경쟁적으로 영입 경쟁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김 전 장관의 비례 순번은 6번이었습니다. 비례 순번만 놓고 보면 위성락 후보가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이지요.

한국의 ‘조지 케넌’…북미국장‧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요직 두루 역임

‘한국형 외교좌표.’

위 후보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외교부의 최고 전략가를 꼽으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올립니다. 꼼꼼한 정보수집과 치밀한 분석력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송민순 전 외교장관은 회고록에서 9‧19 공동성명 작성을 도운 '유능한 행정관'으로 그를 거론하기도 했지요.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가 말한 ‘한국형 좌표’를 실천한 외교는 무엇일까요. 대표적으로는 소련과의 수교를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실무자였던 위 후보는 양국 영사처 신설을 제안해 국교 정상화까지 안정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했습니다. 2002년 ‘2차 북핵위기’ 당시엔 북미국장으로서 미국과 대응을 조율했습니다. 당시 공을 인정받아 2009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 기용됐는데요.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된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미국은 한국 정부가 추구하는 한반도정책과 평화의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위 후보의 조언을 여러 차례 구했습니다. 실제 위 후보는 ‘한반도 비핵화에 기반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남북뿐만 아니라 주변 4강의 이해관계 접점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선 북미 간 협상이 우선적으로 중요하지만, 평화가 안정적으로 구축되려면 주변국 4강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전략가로서의 역량은 그가 받은 ‘외무장관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외교관이 재외공관 근무를 할 때 작성하는 ‘외교전문’은 주재 국가의 정치‧경제 동향을 포함해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전략을 제시하는 중요 지표가 됩니다.

2010년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만난 위성락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0년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와 만난 위성락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외교관이 이 전문 작성을 소홀히 해 국익을 훼손한 대표적 사례로는 ‘중국 요소 수출 제한’ 사태가 있습니다. 2021년 장하성 당시 주중대사가 이끌었던 주중한국대사관은 10월 15일부터 석탄에서 추출되는 요소에 대한 수출 전 상품검사를 의무화하겠다는 중국 정부의 공고문을 확인하고도 이를 관세청 등에 전문으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내부 직원들이 중국의 공고가 국내에 미칠 영향력을 미처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사고였죠. 반면, 외교관이 작성한 전문으로 국제 정세가 크게 뒤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지 F. 케넌 주소련 미국대사대리가 있죠. 그가 미 국무부에 제출한 8,000단어 상당의 ‘긴 전보(Long Telegram)’는 소련의 사회‧공산주의 팽창정책을 파악하고, 이를 저지하는 봉쇄전략(containment policy)를 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미‧소 냉전 시대의 포문을 연 핵심 자료인 셈이죠.

위 후보는 대한민국 외교관 중에서도 이 전문을 작성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장관상을 받았습니다. 실제 그는 평소 후배들에게 “외교 행정이 대부분의 업무를 차지하지만, 본인의 역량개발을 위해 정세 분석을 꾸준히 해야 한다”고 조언해왔습니다.

정계진출 둘러싼 우려와 기대…“이재명, 위 후보의 외교관과는 정반대”

2009년 미국 안보리결의1874호(대북제재) 이행조정관이었던 필립 골드버그 현 주한미국대사는 위성락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게 북한의 비핵화 견인 방안에 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2009년 골드버그 조정관과 위 본부장이 면담하는 사진. 왕태석 선임기자

2009년 미국 안보리결의1874호(대북제재) 이행조정관이었던 필립 골드버그 현 주한미국대사는 위성락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게 북한의 비핵화 견인 방안에 대해 여러 차례 의견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은 2009년 골드버그 조정관과 위 본부장이 면담하는 사진. 왕태석 선임기자

외교관으로서 위 후보의 역량을 고려하면 비례대표 2번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외교가에선 그의 행보를 두고 우려의 목소리도 나옵니다. 왜 그럴까요.

지난 2021년 위 후보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현 당대표) 캠프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이들이 놀랐습니다. 이 후보가 대외행보 및 발언을 통해 보여준 외교 철학은 위 후보가 그동안 중시해온 ‘한국형 외교좌표’와는 간극이 있어보였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대표의 외교관은 위 후보가 경계해온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와 이념‧당파적 관점에 가까워 보입니다. 2021년 7월 “대한민국이 친일 청산을 못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했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한미일 연합훈련을 두고는 “극단적 친일행위”라면서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리는 일이 실제로 생길 수 있다”고 몰아간 전례도 있습니다. 한 외교관은 “위 후보가 이 대표의 이 같은 도발적 발언과 행보를 저지하고 그가 강조해온 ‘외교 개혁’을 이룰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위 후보에게 그만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고 민주당에도 정제된 메시지가 나오지 않는 이상 후배 외교관들은 위 후보가 이 대표의 이미지 포장을 위해 이용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이 대표는 이번 총선을 '신한일전'이라고 규정하며 국민의힘을 '친일 프레임'에 묶어 거친 발언으로 공세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위 후보는 한반도가 주변 4강(미국‧중국‧일본‧러시아)에 둘러싸여 있는 만큼 ‘섬세한 외교접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현실만 논하는 외교는 쉽고 이상만 좇는 외교는 공허”하다는 그의 지론에 따른 것입니다. 대한민국 외교의 핵심축은 한미동맹이 될 수밖에 없지만, 한반도 평화라는 목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대척하기 쉬운 주변4강의 이해관계가 겹쳤을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자극적인 레토릭은 한국 외교에 도움이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중국이 9시, 미국이 3시면 우린 1시 내지 1시 30분쯤 있어야 한다”는 말도 이 인식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모순적이게도 위 후보는 뛰어난 역량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보수, 그 어느 쪽에도 환영받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5대 수렁’에 빠진 한국외교…위 후보의 정계진출, 개혁 이룰 수 있을까

이 같은 우려 속에서도 위 후보가 정계 진출을 택한 건 자기중심적 관점, 국내정치적 관점, 인기영합주의, 이념‧당파적 관점 등 5대 수렁에 빠진 한국 외교를 개혁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대한민국 외교생태계를 개선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촘촘한 외교전략을 실현해나가려면 핵심 행위자인 집권 엘리트‧관료‧정치인‧학계‧언론‧시민단체가 개혁의 주체이자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혀왔습니다. 그가 쓴 ‘대한민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에도 이 같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외교 개혁을 향한 위 후보의 정계 진출 도전은 인상적인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국회의 도움 없이는 역량 있는 외교관 양성도, 증원도, 초당파적 외교 전략도 어려운 게 현실입니다. 여의도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그가 오랫동안 품어온 소신을 실현할 수 있을지가 22대 국회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입니다.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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