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SKY 영문과’ 행세한 고졸 입시코디… 대치동 흔든 입시 사기의 전말

입력
2024.03.30 10:00
수정
2024.03.30 14:18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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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교수 연결 가능" 거짓말로 돈받고
일타강사 소개한다며 알바강사 섭외해
사기 들통나자 '감방동기'에 책임 전가
검사의 추가 수사로 사건 전모 드러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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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중학생 딸을 둔 A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주거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귀인'을 만났다. 이웃에 산다는 여성 안모씨는 자신을 "고려대 영문과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지금은 미대 입시를 전담하는 11년 차 입시 코디네이터"라고 했다. 때마침 A씨 딸은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졌고 안씨는 "홍대 미대 B교수, 서울대 미대 C교수 등과 친분이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C교수에게 실기지도를 받게 해줄 수 있다"거나 "교수가 이끄는 팀과 함께 해외 미술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귀인'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2억 원을 달라기에 선뜻 돈을 송금했지만, 웬일인지 진척이 더뎠다. 안씨에게 물어보니 "교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는 말만 돌아왔다. 불안해하는 A씨를 위해 안씨가 주선한 C교수와의 부부동반 만남도 "교수님이 전날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혹시나 해서 교수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확인했지만, 'C'라는 이름의 환자는 없었다. 안씨가 알려준 C교수 번호도 다른 사람 것이었다. 사기였다. 안씨는 A씨 딸이 미대를 준비한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접근한 것이었다.

스카이캐슬은 다 가짜였다

검찰 수사 결과, 안씨는 대학에 진학한 적 없는 사기 전과자였다. 그는 서울 강남구 오피스텔에 '입시상담소'를 차린 뒤,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떠올리게 하는 허위 경력을 앞세워 입시상담가로 활동하며, 학부모들의 돈을 뜯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건물 오피스텔 여덟 채에서 내가 관리하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거나 "모두 대치동 일타강사급"이라는 말로 학부모들을 꼬드겼다. 코디가 가능한 과목도 미술, 물리, 수학 등 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안씨의 경력은 보습학원 아르바이트가 전부였다.

그가 관리하는 '일타강사'도 다 거짓말이었다. 그는 입시 관리 계약을 체결한 뒤 '숨은고수' '김과외' 등 휴대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시간당 2만~7만 원으로 선생님을 섭외해 과외를 진행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기도 모자라 무고·위증교사까지

대범한 사기 행각을 벌이다 조금씩 정체가 드러나자, 안씨는 새로운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그때부터 안씨는 "진짜 범인은 내가 아닌 강모씨"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수사를 받고 기소된 이후에도 "강씨가 C교수를 섭외해 줄 것처럼 나를 속여 돈을 뜯어갔다"고 책임을 미뤘다.

하지만 14년 차 베테랑 검사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강씨는 사기 전과 6범이었지만, 대부분 중고거래 사기 정도의 경미한 범죄였다. 다수의 부자를 상대로 대범하게 사기행각을 벌인 이번 사건과 성격이 달랐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서울중앙지검 공판1부 소속 김지혜(사법연수원 40기) 검사는 안씨와 강씨를 위증 관련 혐의로 입건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수사 결과, 강씨는 '김과외' 등 앱의 아이디나 닉네임도 몰랐고, 과외 선생님들과의 연락은 모두 안씨의 휴대폰을 통해 이뤄졌다. 사건 관계자 누구도 강씨를 알지 못했다. 강씨와 안씨의 공모 관계를 입증할 계좌 거래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런 정황을 근거로 강씨의 휴대폰을 압수수색했더니 안씨와 위증을 논의한 통화녹음 파일 등이 발견됐다.

알고 봤더니 두 사람은 2018년 교도소 같은 방에 있던 '감방 동기'였고, 안씨가 강씨를 설득해 가짜 범인을 내세운 것이었다. 강씨는 출소 후에도 가족과 연락 없이 혼자 빈곤한 생활을 했는데, 유일하게 가깝게 지낸 안씨가 강씨를 심리적으로 지배하며 거짓 자백을 하게 한 것이다. 안씨는 강씨에게 거짓 자백과 위증을 하면 5,000만 원을 주겠다고 했으나, 이 약속 역시나 '사기'였다.

검사의 추궁에도 거짓 자백을 실토하지 않던 강씨는 올해 1월 12일 골드바 투자 사기 혐의로 다시 구치소 신세를 지게 되자 진실을 털어놓았다. 서울중앙지검 공판1부(부장 백수진)는 안씨 등을 무고, 위증교사 혐의로, 강씨를 위증 혐의로 2월 2일 재판에 넘겼다. 미대 교수 소개와 관련한 강씨의 사기 혐의 재판은 검찰의 요청으로 이달 11일 공소기각이 결정됐다.

이 모든 걸 꾸민 안씨는 2020년 4월부터 7월까지 3명의 학부모에게 약 4억 원을 편취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11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중에도 과외 사기 범죄를 이어온 점 등이 중형 선고의 이유가 됐다.

안씨 사기 피해 규모는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체가 알음알음 알려지며 비슷한 피해자들의 고소장 접수가 이어지고 있다. 검찰은 강씨가 범인으로 몰려 수사나 재판을 받고 있는 별도의 사기 사건의 진범도, 사실은 안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수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두 차례 구치소 방문 조사를 통해 강씨의 자백을 받아 낸 김지혜 검사는 "지금까지 드러난 안씨의 범행은 일부분일 뿐"이라며 "사법절차에서 증거를 조작하고 법원과 수사기관을 속이려는 행태를 막기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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