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부 ‘지침’이 바꿀 수 있는 것들

입력
2024.04.05 17:0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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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200만 원 받는 10년차 역무원
공공기관 임금격차 줄이기 가능한데
방관하면서 저출생 지적할 자격 없어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민호 서울 구일역 역무원이 지난달 15일 인터뷰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기획재정부 브리핑 장소에서 보이는 로고. 정다빈 기자· 연합뉴스

이민호 서울 구일역 역무원이 지난달 15일 인터뷰하고 있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기획재정부 브리핑 장소에서 보이는 로고. 정다빈 기자· 연합뉴스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곡 ‘고스트 오브 톰 조드(Ghost of Tom Joad)’의 가사엔 ‘괜찮은 일자리(decent job)’란 표현이 나온다. “괜찮은 일자리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있는 곳 어디서나 그 눈을 보세요, 어머니. 저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미국 대공황 시절 노동계층을 그린 존 스타인벡의 소설 ‘분노의 포도’를 오마주한 곡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기본 조건이 ‘괜찮은 일자리’다. 넉넉하진 않더라도, 퇴근길에 과일가게에서 사과 몇 개를 집어 들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갖는 미래를 그릴 수 있는 그런 일자리 말이다.

지난달 15일 서울 구일역의 10년 차 역무원 이민호씨를 만났다. 한 달 세전 230만 원을 받고, 세후 200만 원을 손에 쥔다. 40대인 그는 ‘당연히’ 결혼을 하지 못했다. 코레일의 자회사인 코레일네트웍스 소속으로 공공기관 직원(무기계약직)인데도, 저질 하청업체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포털에 걸린 그의 인터뷰 기사엔 “억울하면 (코레일) 정규직으로 재입사해라”, “누가 정규직 공채 지원 막았나, 노력한 만큼 받는 거다”라는 조롱 댓글이 수두룩하다. ‘정규직 시험’이 지고지순한 공정이며 유일한 노력이니, 시험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괜찮은 일자리’를 바랄 자격이 없다는 준엄한 꾸짖음들이다. 코레일 정규직과 똑같은 대우를 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런 여론을 ‘뒷배’ 삼은 것인지, 공공기관 임금 정책을 펴는 기획재정부는 코레일네트웍스 역무원들의 저임금 문제를 방관해왔다. 기재부 지침에 따르면, 올해 코레일네트웍스의 인건비 총액 인상률은 3.5%로 제한되며 이런 인상률로는 매년 최저임금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 원래 공기업 정규직의 무분별한 임금인상을 제한하기 위해 도입됐는데, 임금 수준과 상관없이 일률 적용되다 보니 정규직과 무기계약직의 임금격차는 해마다 더 벌어진다.

노동시장 임금 양극화를 줄이기 위한 ‘상생임금’ 추진은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이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조선업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을 위해 하청 임금체불 및 중간착취 방지를 위한 조선 5사 에스크로제도(임금 전용계좌) 도입, 공동근로복지기금 출연 확대 등의 성과를 냈다고 발표했다. 조선 하청 노동자 임금은 지난해 7.51% 인상됐다.

민간 기업에도 고용부가 개입해서 임금격차를 줄이려고 하는데, 기재부는 정부가 사장 임명까지 관여하는 공공기관 임금격차는 왜 방관하고 있는 것일까. 시장자율과 효율성만 중시하는 경제부처 마인드를 벗어나지 못해서인가 싶다.

사실 기재부 지침과 의지로 개선할 수 있는 사안은 많다. 공공기관 직원 중 심각한 저임금의 경우 예외적 임금 인상 승인, 중간착취 방지를 위해 조달·민간위탁사업 전산시스템에 임금 전용계좌 등록 기능 지원,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임금격차 완화 및 무기계약직 처우개선 배점 확대 등만 마련해도 ‘괜찮은 일자리’ 증가 효과가 있을 것이다. 공공부문이 이런 노력을 보여줘야 민간 기업에도 정부가 할 말이 있을 것 아닌가.

작년 한 설문조사에서 청년 40%가 “연봉 4,000만 원 넘어야 결혼 결심”이라고 답했다. 공공분야조차 정부가 임금 양극화와 저질 일자리를 방치하면서, 한쪽으론 ‘저출생 극복’을 외치는 건 기만이며 보여주기식 구호일 뿐이다.

혹시 기재부도 일부 국민들처럼 ‘정규직’만이 사람 취급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내심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저출생 극복은 국가 어젠다에서 내리는 게 그나마 솔직하겠다.

이진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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