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속으로 뛰어든 아스테카의 신들

입력
2024.04.05 00:01
26면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서 보이는 대성당. ⓒ게티이미지뱅크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에서 보이는 대성당. ⓒ게티이미지뱅크

눈을 꼭 감은 여자가 간절하게도 손을 모았다. 몇 년째 몸져누운 남편 때문에 시커먼 우울함이 자꾸 마음에 스며든다고 했다. 남편과 딸들의 평화를 위해 영혼 정화 의식을 하러 온 여자. 아스테카 주술사는 송진과 풀로 만든 향을 태우며 풀썩풀썩 허연 연기를 피웠다. 고동 나팔을 불며 무언가를 깨우더니 풀 다발로 몸 여기저기를 치며 무언가를 몰아냈다. 매캐한 연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쁜 영혼이 빠져나갔다는 신호를 느낀 건지, 여자의 눈가에는 조금씩 편안한 눈물이 맺혔다.

광장의 구석에서 시작한 북소리가 둥둥 두두둥, 드넓은 소칼로(zocalo) 광장에 깔린 공기를 무겁게 울렸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대성당과 아스테카인들이 세운 신전 사이의 작은 공터였다. 머리와 어깨에 깃털 장식을 달고 전통 문양을 넣어서 짠 천으로 아스테카 복장을 갖춘 이들이 한가득. 힘찬 북소리가 울려 퍼지면 그 거친 리듬에 맞춰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춤을 추었다. 아스테카 제국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메우는 멕시코시티의 사람들이었다.

아스테카라는 단어도 익숙하지 않은데, 아스테카 제국의 옛 수도가 지금의 멕시코시티 자리라는 걸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손발이 저릿하고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고산 증세가 슬슬 시작되는 해발고도 2,200m. 이 높은 고원에 넓은 호수가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아스테카의 왕들은 대대로 치수 사업을 추진하며 섬과 호수 주변의 땅을 연결해 호수에 뜬 섬을 인구 20만 명의 번듯한 도시국가로 만들었다.

유럽 최대 도시인 파리에 18만 명이 살던 시절이었으니, 1519년 이곳에 처음 닿은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마법과도 같은 대도시였다. 하지만 '부자 도시 베네치아'라 부를 만큼 감탄했던 놀라움도 잠시, 아스테카를 점령한 스페인 군인들은 신전을 부수고 호수를 메운 자리 위에 또 하나의 스페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최대 규모이자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대성당 역시 아스테카의 중심인 태양의 신전을 무너뜨린 후 240년이나 공들여 쌓은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 약한 지반에 세워진 탓에 지금도 계속 기울어지며 가라앉는 중. 대성당 안에는 기울어진 정도를 보여주는 길고 거대한 추까지 달려 있다. 조금씩 가라앉는 정복자들의 욕심을 바라보는 기분이란, 맞지 않는 자리를 탐내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위태로움과도 비슷했다.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사전투표가 시작되는 오늘, 세상을 구하겠다며 불로 뛰어든 아스테카 신들의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세상의 네 번째 태양이 사라지고 대혼란이 시작되자 고민에 빠진 신들은 결국 2명의 신을 희생해 새로운 태양과 달을 만들기로 한다. 푸룰렌토는 가장 왜소하고 못생긴 신이었지만 주저 없이 불 속에 뛰어들고 벌겋게 달아올라 태양이 되었고, 제일 잘생긴 데다 큰소리까지 쳤던 카라콜레스는 끝끝내 머뭇거리다가 화가 난 신들에게 뺨을 맞은 흉터가 반점으로 남은 달이 되었다. 부디 번드르르한 겉만 보고 판단하지는 않을 지혜를 우리 유권자가 가지기를, 적어도 서슴없이 뛰어드는 마음 정도는 품은 이들이 우리의 대표자로 나서준 것이기를, 진실한 희생으로 만들어졌다는 아스테카의 다섯 번째 태양에 빌어보는 하루다.


전혜진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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