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누구 편이냐"만 묻는 전짓불 시대

입력
2024.03.2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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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출판 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100권이 넘는 신간이 쌓입니다. 표지와 목차, 그리고 본문을 한 장씩 넘기면서 글을 쓴 사람과, 책을 만드는 사람, 그리고 이를 읽는 사람을 생각합니다. 활자로 연결된 책과 출판의 세계를 격주로 살펴봅니다.


지난해 대법원 양형위원장이던 김영란 전 대법관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대법원 양형위원장이던 김영란 전 대법관이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또 찾아온 '자유'의 시대, 김영란 전 대법관이 '판결 너머 자유'란 책을 냈습니다. 로스쿨 학생들과 대법원의 최신 전원합의체 판결을 읽어나간 기록입니다. 대법원이 시대 변화에 발맞추기 위해 나름 판례를 변경해나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을 굳이 왜 책으로 내야겠다 생각했을까요.

김 전 대법관은 소설가 이청준(1939~2008)의 1971년 작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 얘기를 꺼냅니다. 한국전쟁 당시 눈조차 똑바로 뜰 수 없는 전짓불을 받으면서 남북 양쪽으로부터 "넌 누구 편이냐"고 추궁받아야 했던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지금 다시 그런 시대가 돌아온 겁니다.

영화 '서편제'와 '밀양'의 원작자로 유명한 소설가 이청준. 문학과지성사 제공

영화 '서편제'와 '밀양'의 원작자로 유명한 소설가 이청준. 문학과지성사 제공


이런 극단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김 전 대법관은 '정의론'으로 유명한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자유주의에 주목합니다. 이런저런 복잡한 논의를 거쳐 롤스는 자유주의란 '합당한 다원주의 현실로 인한 합당한 불일치'를 감내하는 태도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합니다.

복잡다단해진 사회는 저절로 여러 가치가 경합하는 다원주의적 현실을 만들어냅니다. 그런 다원주의 현실 때문에라도 불일치는 더 이상 죄악이 아닙니다. 저마다의 정의가 존재합니다. 불편하고 귀찮고 까다롭다 해도 그것은 곧 '합당한' 불일치를 뜻합니다. 합당한 불일치를 있는 그대로 껴안는 것, 그게 곧 현대 사회 자유의 핵심이라는 겁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의 '판결 너머 자유'

김영란 전 대법관의 '판결 너머 자유'


법률가로서 김 전 대법관은 다양을 넘어 때론 충돌하는 의견들이 공존하는 생생한 사례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문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저마다 타인의 얼굴에다 전짓불을 무례하게 쏘아대며 "넌 누구 편이냐"만 묻는 시대, 그런 사람이야말로 실은 합당한 불일치를 감내해낼 자신이 없는 가장 반자유주의적 사람이라는 질책도 담겼을 겁니다. 어려운 법률 용어투성이인 전원합의체 판결, 그래서 읽어볼 만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태성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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